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어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은 반바지나 치마를 입어야 한다.
그나마 너무 커서 걸을 때마다 헐거덕헐거덕 벗겨질 듯 하던 검정고무신이 얼추 발에 맞아서 미끄러져 넘어질 일이 줄었다.
책을 묶은 보자기를 허리에 단단히 묶으며 학교에 갈 채비를 한다.
우산이 식구 수 대로 있지 않기 때문에 우산을 대신 할 우비를 쓸것이다.
우리 집 우비는 비료를 담았던 두껍고 튼튼한 비닐포대로 만든다.
깨끗하게 닦았지만 비료 냄새가 나는 비료포대의 한 쪽을 낫으로 쭈욱 찢으면 우비 완성이다.
나머지 모서리를 고깔처럼 위로 향하게 쓰고 앞섶을 잘 여며서 붙잡고 길을 나선다.
비가 세차게 오니 도꾸녀석이 따라 나설 엄두를 못낸다.
오늘의 등굣길은 도꾸녀석과 씨름을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비닐을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가 고스란히 머리로, 어깨로 느껴진다.
타닥타닥 두드리는 느낌이 안마를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빗소리가 음악 소리 같기도 해서 기분이 좋다.
길가의 풀들은 빗물에 흔들흔들 휘청휘청 춤을 추고 개구리들도 첨벙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웅덩이에 고인 물을 세게 밟으니 물이 분수처럼 퍼진다.
깡총거리며 웅덩이들을 건너뛸 때마다 내가 개구리같다.
큰 길로 접어드니 이마를 맞댄 아이들의 우산이 알록달록 꽃 같다.
짖궂은 녀석들은 우산을 뱅그르르 돌려 빗물세례를 퍼붓기도 하지만 나의 비료포대 우비는 철통방어를 한다.
학교에 도착해서 우산들을 가지런히 세워 놓는데, 나는 우비를 어떻게 세워서 빗물을 말려야 하나 잠시 난감해진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내 우비를 보시더니 웃음을 터뜨리시며 신기한 듯 이리저리 만져보신다.
그리고는 특별한 우비이니 잘 말려야 한다며 교무실로 가져가신다.
수업을 마치고 우비를 찾으러 교무실로 가니 선생님들이 한 번씩 다 써보셨다고 하신다.
뭔가 으쓱한 마음에 기분이 좋다.
친구들은 그런 내가 부러웠던지 그 이후로는 집집마다 구석에 팽개쳐졌던 비료포대 우비를 꺼내서 쓰고 오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날씨가 맑아지면 우비를 잘 말려서 예쁜 그림을 그려넣어야겠다.


'병마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꼬마 농사꾼들  (2) 2025.04.25
모내기 하는 날  (4) 2025.04.22
칡 캐먹다가 지각한 사연  (2) 2025.04.19
봄 비가 내리면 텅 비는 우리집  (2) 2025.04.18
뱀 떼를 만나다  (0) 2025.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