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의 세상보기
느긋한 늑대 / 2025. 7. 3. 12:26 / 병마골 이야기

우리동네는 찻길에서 갈라진 길로 들어서서 개울물을 중심으로 대략 5~6킬로에 걸친 깊숙한 골짜기입니다.
겹겹이 둘러싼 산이 많다보니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고 비탈길에 울퉁불퉁 튀어나온 돌과 바위도 많지요.
모퉁이를 돌면 집 한 채, 깊숙히 휘어진 길을 돌면 약간 틔인 평지에 몇 채, 이렇게 드문드문 집들이 자리잡고 있고, 집집마다 개와 고양이가 있어서 지나갈 때마다 컹컹 왈왈 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밤이 되면 코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합니다.
그렇지만 달이 뜨고 별이 뜨면 희부옇게 길도 보이고 온 천지가 다 보입니다.
밤하늘은 그야말로 별이 쏟아질 만큼 많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가 뚜렷하게 보입니다.
누군가는 자세히 보면 견우랑 직녀도 보일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맑고 뚜렷한 하늘입니다.
문명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인지 야생동물의 천국이지요.
물도 청정 1급수라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르면 개울물에 엎드려 코를 박고 물을 꿀꺽꿀꺽 들이킵니다.
다슬기도 많고 버들치, 모래무지, 꺽지, 쏘가리 등등 민물고기도 많아서 여름철 동네 어른들은 천렵을 하곤 한답니다.
산과 들은 그야말로 먹을 것이 천지입니다.
봄나물은 물론이고 버섯이며 더덕이며 약초까지, 부지런한 사람들은 광에 그득하게 쟁여놓지요.
대부분은 부지런합니다.
아버지는 고추밭 사이사이에 오이랑 수박을 심어놓는데, 다 익을 때면 동네 총각들이 서리를 하러 빈번하게 들락거립니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고춧대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다 알고 있으니 서리도 아니네요.
집집마다 과일나무가 있지만 산에 들에 열리는 과일도 많아서 다양한 맛은 먹을거리를 호사스럽게 누립니다.
산딸기, 머루, 다래, 버찌, 오디, 밤, 개금, 개복숭아, 팥배, 돌배 등등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지요.
봄에는 찔레 새순, 국수나무 새순, 붉나무 새순, 바위나리 순 등등 간식거리가 마구마구 나고요,
돼지감자라고 부르는 뚱딴지도 아삭하고 달콤해요.
농사일 틈틈이 나물을 뜯고 말려서 겨울철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품앗이를 할 때 먹는 못밥이나 새참은 잊지 못할 만큼 맛있답니다.
겨울이 되면 눈이 하도 많이 내려서 미처 녹지 못하고 단단해 지면 어른들이 장화를 신고 발자국을 내주어야 학교를 갈 수 있고요,
이런저런 썰매용 도구와 놀잇감으로 겨울도 심심하지 않아요.
새소리, 짐승소리가 어떤 음악소리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고 재미있어요.
우리 동네가 상상 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나요?
아마 그림대로 일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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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6. 30. 16:59 / 병마골 이야기

한낮의 햇빛이 뜨겁다.
호박잎도 축 늘어졌고 개들도 혀를 길게 빼물고 그늘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헉헉거린다.
털옷을 입었으니 얼마나 더울까 안쓰러운 생각에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으니 그건 아닌지 몸을 세차게 흔들어 털고는 다른 그늘을 찾아 가버린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최고다.
동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큰 개울로 나간다.
얕고 넓게 흐르던 물이 작은 폭포를 만나 아래로 뚝 떨어지며 휘돌아 제법 큰 소를 만들어 헤엄치기에 제격인 곳으로 간다.
커다란 바위에 신발과 옷을 벗어놓고 물로 들어가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나도 모르게 흐읍! 숨을 고르고 몸을 움찔 한다.
물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심장 놀라지 말라고 팔이며 어깨, 가슴에 물을 끼얹는다.
준비를 마치고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발장구를 열심히 치고 팔을 허우적 거리는 개헤엄을 치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갔다 신나게 논다.
조금 있으니 동네 친구들이 하나 둘 합세해서 어느 새 자연 수영장이 만원이다.
친구의 물장구로 물세례를 맞고 연신 손으로 얼굴을 훔치기도 하고, 잠수했다가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면 온통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어 그 모습에 배꼽이 빠져라 웃기도 한다.
개헤엄이 힘들면 얕은 곳으로 가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명 땅 짚고 헤엄치기를 한다.
한참을 놀다가 입술이 퍼렇게 변하고 좀 춥다는 것을 느끼면 바위 위로 올라가 대자로 누워 몸을 말린다.
뜨끈뜨끈해진 바위에 누워서 한창 수다를 떨고 있는데 저 아래에서 동네 아저씨가 올라오시는 것이 보인다.
벌거숭이인 것을 보이면 창피하니 후다닥 일어난 우리들은 잽싸게 물 속으로 풍덩풍덩 들어가서 머리만 내밀고 인사를 한다.
아저씨는 너무 오래도록 놀지마라 배앓이한다 하시며 올라가신다.
그 때 발가락을 간질이는 뭔가가 있어 물속을 들여다보니 모래무지가 모래먼지를 풍기며 몸을 숨기고 있다.
우리들은 모래무지를 잡으려고 우당탕거리며 물이 부옇게 되도록 물 속 모래를 헤집는다.
정신없는 와중에 뭔가 종아리를 스윽 스치는 느낌에 흐린 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물뱀이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지나간다.
흐에엑 하고 놀라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물 밖으로 뛰어 나온다.
다시 물에 들어갈 생각이 뚝 떨어진다.
이제 그만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에 뭍은 모래를 털고  고무신도 한 번 헹궈서  신고 집으로 간다.
기세가 등등하던 햇빛은 어느새 순해졌는지 시원한 바람을 살랑살랑 보드랍게 보내며 나를 달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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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6. 24. 12:06 / 병마골 이야기

아침에 일어나서 개울로 세수하러 가는데 좁은 길 양옆에 무성하게 늘어진 풀에 이슬이 조롱조롱 맺혔다.
아침 햇살을 받아 알알이 보석 처럼 반짝거린다.
내 발에 채일 때마다 톡톡 부서지며 내 다리를 적시니
내 다리는 반짝거리는 보석들로 가득하다.
기분 좋게 겅중거리며 학교에 간다.
돌아오는 길에 긴 막대기로 길 옆의 풀을 괜시리 뒤적거리며 느릿느릿 걷는데, 풀 숲에 빨간 뱀딸기들이 가득하다.
초록색 풀과 빨간 뱀딸기가 참 예쁘게 어울린다.
앵두만한 뱀딸기는 예쁘긴 하지만 새콤하지도 달콤하지도 않고 향도 없으니 맛이 없어서 잘 먹지 않는다.
나는 이삭이 길게 삐져나온 풀을 이삭을 잡고 쑤욱 뽑아서   거꾸로 잡고 뱀딸기를 따서 하나씩 꿰기 시작한다.
뱀딸기의 중심 부분으로 풀줄기를 꽂으면 쏘옥 잘 들어가서 꿰는 재미가 있다.
열 몇개쯤을 꿰니 줄지어 매달린 빨간 뱀딸기가 보석처럼 보인다.
손에 쥐고 휘휘 돌리며 걷다가 하나를 톡 따서 입에 넣는다.
그런데 웬일로 맛있게 느껴진다.
이상하네 하며 하나를 더 입에 넣어보니 작은 씨앗들이 토독토독 씹히고 딸기 과듭과 섞여서 새삼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 하나 따 먹다 보니 어느새 풀줄기가 비었다.
혹시나 뱀딸기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맛있어진 것인가 궁금해진 나는 풀숲을 헤치고 뱀딸기를 따서 먹는다.
그러나 여전히 맛이 없다.
머리를 갸우뚱 하며 풀줄기를 뽑아서 뱀딸기를 몇 개 꿴 후, 다시 풀줄기에서 떼어내 먹어보니 이건 또 맛있다.
풀에 꿰어 먹는 뱀딸기가 더 맛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부터 내 눈에 띄는 뱀딸기는 모두 풀줄기에 꿰어지고 만다.
나의 뱀딸기 레시피는 내 친구들어게도 알려져서 한동안 뱀딸기를 주렁주렁 꿰어 들고 다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도 있을 것 같으니 계속해서 연구와 실험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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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6. 17. 20:57 / 병마골 이야기

이른 봄에 장에서 사 온 병아리들이 날로 쑥쑥 자란다.
개와 고양이에게 쫒겨서 떼를 지어 도망다니고, 닭장 구석에 옹기종기 몸을 부비며 잠을 자던 녀석들이 걸음걸이도 느릿느릿하고 옆으로 뭐가 지나가든 전혀 신경쓰지 않을 만큼 컸다
수 십마리의 암탉을 거느린 두 마리의 수탉은 날개를 잔뜩 부풀리고 목청 좋게 울어제끼며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가끔은 족제비가 닭장의 철망을 망가뜨리며 닭들을 노리고, 하늘 높이 뜬 솔개가 호시탐탐 닭을 낚아채 갈 틈을 보기도 해서 마음을 놓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닭장에만 가두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아침에 닭장 문을 활짝 열면 닭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여기 저기 흩어져서 모이를 찾는다.
밭을 헤쳐 놓다가 아버지의 호통에 혼비백산 도망치기도 하고 개울물을 부리에 담고 목을 한껏 뒤로 젖혀서 삼키는 녀석도 있다.
풀숲을 헤치면서 벌레를 쪼아먹기도 하고 풀쩍 뛰어오르는 개구리에게 놀라서 뒤뚱뒤뚱 도망을 치기도 한다.
해가 서쪽 산봉우리에 걸치면 하루 종일 들판을 누비던 녀석들을 불러 모아 닭장으로 들여보낸다.
숫자가 맞지 않으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찾아야 하기 때문에 온 식구가 흩어져서 찾아헤매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놀던 닭이 꼬꼬댁 꼬꼬 하고 소리를 친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부리나케 달려가니 풀 숲에 하얗고  작은 알이 보인다.
드디어 알을 낳는구나 하고 집어드니 손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올해의 첫 알이라 아버지께 가져다 드리니 아버지는 알을 받아들고 기분이 좋은신지 빙그레 웃으신다.
그 날 이후, 언니들과 나는 닭을 몰아 닭장에 들여보내고 닭 알을 주으러 다닌다.
밭을 샅샅이 뒤지고, 밭둑이랑  풀숲도 들여다보고, 뒷산 중턱까지 오르내리면서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길이 바쁘다.
여기 저기 숨어있는 알을 찾다보면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아 재미도 있다.
바구니가 그득하게 알을 찾아오면 아버지는 지푸라기로 꾸러미를 만드신다.
매일 알을 줍다보니 제법 많은 꾸러미가 만들어진다.
이 꾸러미들은 장날에 내다 팔면 척박한 산골 살림에 제법 보탬이 될 것이다.
꾸러미를 만들던 아버지는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따뜻한 알을 집어들어 이에 톡톡 두드려 조그만 구멍을 만드시더니 호로록 드신다.
물끄러미 바라보니까 너도 먹을래? 하신다.
익히지 않은 날달걀이라 비린내가 날 것 같아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싫다고 하는데, 어느 새 톡톡 깬 알을 쑥 내밀며 먹으라고 하신다.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서 구멍에 입을 대고 쪽 빨아들이니 흰자가 미끄덩하고 목으로 넘어간다.
비위가 상해서 인상을 쓰려는 순간 뒤따라 나온 노른자가 쑤욱 입 안을 지나 목으로 간다.
보드랍고 고소한 맛이 좋아서 입맛을 짭짭 다시니까 아버지는 싫다고 한 적은 언제고 이러다가 우리 집 알은 니가 다 먹는 것이 아니냐며 웃으신다.
아버지 말씀대로 자꾸 생각이 날 것 같다.
닭장어 가니 닭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자고 있다.
닭들이 깰까봐 조용히 내일은 알을 더 많이 낳으라고 말하고 닭들이 듣고 욕심쟁이라고 비웃을까봐 얼른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간다.
마루를 비추는 달이 내 발자국에 그림자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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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6. 12. 17:12 / 병마골 이야기

창호 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점점 강해지더니 논에, 밭에 작물들이 키도 쑥쑥 크고 이파리도 넓어진다.
날씨가 더워지면 풀과의 전쟁이다.
비 온 다음날은 작물과 함께 풀도 쑥쑥 자라기 때문에 온종일 밭에 엎드려 김을 매는 일이 일과의 대부분이다.
이렇게 뜨거운 여름을 더 뜨겁게 불태우고 나면 농작물들은 튼실한 수확물로 보답을 한다.
오늘은 참깨를 괴롭히는 벌레인 깻망아지를 잡으러 참깨밭으로 출동이다.
연두색의 깻망아지는 굵은 몸집에 길이도 길어서 아주 징그럽고 무섭다.
하지만 고생하며 돌본 참깨에 해를 입히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석유통과 솜방망이를 들고 참깨밭으로 가니 연분홍 참깨 꽃이 지고 줄기마다 참깨가 조롱조롱 열려서 예쁘게 잘 여물어가고 있다.
둘째언니, 세째언니, 네째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는 석유를 흠뻑 적신 솜방망이를 들고 참깨를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한다.
줄기나 잎과 색이 비슷해서 꼼꼼하게 잘 봐야한다.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깨 줄기가 뭔가 두께가 다른 것을 발견한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자세히 보니 역시나 깻망아지다.
석유방망이로 벌레를 툭툭 몇 번 건드리면 크고 굵은 깻망아지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아부지~~ 하고 부르니 아버지는 발로 콱 밟아! 하신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고 울상을 지으니 둘째언니가 와서 큰 돌맹이로 콱 눌러놓는다.
일단은 벌레가 안 보이니 좋다.
아버지가 가까이 오시더니 이렇게 하면 벌레가 안 죽고 다시 나올 수 있다며 돌맹이를 들추고 발로 밟으신다.
아버지도 벌레가 징그럽고 싫을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참고 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좀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이파리 뒤에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석유방망이를 들이댄다.
땅으로 떨어져서 꿈틀거리는 깻망아지를 차마 밟지는 못하겠어서 긴 나무꼬챙이로 돌맹이 위에 올려놓고 큰 돌을 던져서 맞춘다.
벌레가 죽을 때까지 던지고 또 던지는 것을 보고 모두 웃는다.
그런 나를 보고 아버지는 아버지와 협동하자고 하신다.
눈이 밝은 내가 깻망아지를 떨어내면 아버지가 밟기로 한다.
그러자 징그럽고 무서운 것을 꾸욱 눌러참고 있던 언니들도 이때다 싶었는지 다 같이 하기로 한다.
여기 저기에서 벌레를 발견하면 아버지~~하고 부르고 아버지는 장홧발로 콱콱 밟으며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한다.
헙동을 하니 일도 빨라져서 어느덧 참깨밭을 샅샅이 훑고 일이 끝났다.
밭두렁을 지나서 집으로 가는데 바람 한 줄기가 휘익 참깨밭을 스치니 참깨들이 이리저리 몸을 숙인다.
그 모습이 마치 벌레를 잡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 처럼 느껴져서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뿌듯한 마음으로 참깨가 고소하게 익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느긋한 늑대 / 2025. 6. 6. 19:21 / 병마골 이야기

개, 고앙이, 닭은 우리집을 지키는 동물 3총사이다.
개는 뛰어난 청각과 충성심으로 무조건 짖어대고, 고양이는 존재감만으로 쥐를 막아준다.
닭은 딱히 우리를 지켜준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아버지가 특단의 조치를 하신 이후로 부터 가장 든든한 지킴이가 되었다.
잘 짖고 용감하던 도꾸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 가족이 된 흰둥이는 정말 순둥순둥해서 낮선 사람이 와도 멀찌감치에서 꼬리만 살랑살랑 흔든다.
산골의 외딴 집이라 산짐승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낯선 사람이 오면 경계도 해야 하는데 도통 이 녀석은 제 역할은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흰둥이만 보면 " 이녀석! 밥값을 해야지!" 하시며 나무라시는데 흰둥이는 눈치만 슬슬 보면서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으셨는지 아버지는 암탉들을 끌고 다니는 두 마리의 장닭을 부르시더니 모이에 고춧가루를 섞어 주신다.
장닭들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모이를 맛있게 콕콕 찍어 먹더니 한참만에 매운걸 알았나보다.
고개를 홱홱 내젓고 모래흙에 주둥이를 박고 휘젓는 등 당황하는 모습이다.
너무 학대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는데, 이놈들이 고춧가루의 참 매럭을 알아버렸다.
틈만 나면 고추밭에 가서 땅에 떨어진 고추와 고추잎을 쪼아먹는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몇 번 모이에 고춧가루를 섞어 먹이시며 너희들이라도 집을 지켜라 하신다.
정말 고춧가루를 먹고 사나워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장닭 두 마리는 누군가가 우리 집을 오기 위해 길 모퉁이를 돌아서서 들어오기만 하면 날개를 퍼덕이고 길길이 날뛰며 부리로 쪼아댄다.
싸리빗자루를 휘둘러 쫒고서야 겨우 말릴 수 있다.
아버지는 고춧가루를 먹여서 사나워진 거라며 허허 웃으신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닭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달려드는 닭들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겪어야 한다.
닭부리에 찍히면 정말 아프다.
이제는 집에 올 때면 닭의 눈치를 봐야 하니 개가 순해서 했던 걱정 보다 더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아버지는 고춧가루를 조금만 먹일걸 하신다.
결국 우리집을 든든하게 지키던 장닭 두 마리는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져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한여름 복날 동네 어른들의 몸보신에 희생되면서 닭의 시달림에서 벗어났다.
그 이후로 다시는 닭에게 고춧가루를 먹이지 않기로 했다.
나는 봄에 장터에서 사 온 병아리들이 커가면서 고추받으로 들어가면 얼른 쫒아낼 만큼 예민한 기억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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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6. 6. 15:19 / 병마골 이야기

우리 아버지는 참 부지런하신 분이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셔서 소 먹이부터 챙겨 주고 논에 가서 물이 잘 들어가는지, 논에 물은 적당하게 차 있는지를 살펴 보시고 소가 먹을 신선한 소꼴(풀)을 지게의 소쿠리가 넘치도록 가득 지고 오신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지게는 늘 바쁘다.
봄에는 거름을 져 날라야 하고. 농기구들을 싣기도 하며,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소 꼴을 져 나른다.
겨울에는 농한기이니 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어림없다.
산에 가서 땔깜을 베어 날라야 하니 사계절 쉴틈이 없다.
바쁜 아버지는 졸졸 따라다니는 나는 아버지 처럼 지게를 가지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내 지게를 만들어 달라고 졸라 보지만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빙긋 웃으시기만 하고 도통 만들어 주실 생각이 없다.
아버지가 꼴을 베러 가시면 나는 아버지 뒤를 졸졸 쫒아가서 내가 들 수 있을 만큼의 풀을 한아름만 들고 올 수 밖에 없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처럼 지게에 한가득 지고 오고 싶다.
어느 날, 아버지의 지게가 외양간 옆 벽에 기대어 있는 것을 본 나는 아버지의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여기저기 떨어진 나무삭정이들을 주워 모으니 한아름쯤 된다
칡넝쿨을 잘라서 반으로 가르고 다시 반으로 더 갈라서 나뭇짐을 묶는다.
지게에 얹고 지게 끈을 양 어깨에 걸고는 지게작대기를 짚고 끙! 하고 일어선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지만  나뭇단이 크지 않아서 그런대로 질 만하다.
지게작대기로 무게중심을 잡으면서 집으로 향한다.
나를 보고 놀라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집이 저만치 보일 때부터는 내리막 비탈길이다.
마당에서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비탈길로 접어들어 성큼성큼 내려가는 순간, 지게 다리가 비탈길에 걸리면서 앞으로 고꾸라진다.
내 키에는 긴 지게다리가 내리막길에서 걸리고 만 것이다.
지게를 진 재로 길 옆 풀숲에 쳐박히고 나니 여기저기 쓸리며 난 상처가 아플 법도 한데 행여나 지게가 부러졌는지 살피느라 아픈 줄도 모르고 정신이 없다.
다행이도 지게는 멀쩡하다.
나뭇단을 머리에 이고 지게를 질질 끌면서 집으로 간다.
아버지는 지게를 받으시며 내 꼬락서니를 보시더니 혀를 끌끌 차신다.
옷을 툭툭 털고 개울에 가서 세수를 하는데 나뭇가지에 쓸리고 찢긴 상처들이 물에 닿으니 몹시 쓰리고 아프다.
그래도 창피한 마음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집으로 들어간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눈이 휘둥그레 커지고 만다.
마당에 작고 아담한 새 지게가 지게 작대기에 고여 서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 키에 맞는 지게를 만드신 것이다.
나는 좋아서 팔짝빨짝 뛴다.
그런 나를 보시고 아버지는 "이 녀석아~ 일하는 게 뭐가 좋다고 지게타령이야~" 하신다.
나는 신이나서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간다.
삭정이를 또 신이나게 주워서 지게에 얹고 집으로 간다.
내리막길을 막 내려가도 지게다리가 걸리지 않는다.
내 지게는 그 날 이후로 나와 한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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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6. 2. 17:10 / 병마골 이야기

앞산의 연둣빛 나뭇잎들이 나날이 초록으로 색이 진해진다.
한낮에는 제법 햇빛이 따끈따끈해서 자꾸 그늘을 찾게 된다.
논두렁에 가득 찬 풀 사이로 빼꼼빼꼼 보이는 빨갛고 앙증맞은 뱀딸기가 보석이 박힌 듯 예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이른 더위를 휘적휘적 헤치며 오는 터라 느릿하다.
길 이쪽 저쪽의 밭들은 제각기 여러가지 작물들을 보듬고 알차게 키워가느라 넓은 품을 한껏 펼친다.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누에를 키우는 터라 밭 가장자리에 뽕나무를 심은 집들이 많다.
어른 키 만한 뽕나무에 오디가 주렁주렁 열렸다.
초록색, 빨간색, 검정색이 섞여서 꽃이 핀 듯 예쁘다.
나무마다 달라서 어떤 나무의 오디는 검정색으로 잘 익은 오디들로 뒤덮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오디 만찬을 즐겨야겠다.
밭 주인 아저씨가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셨으니 명심하고 잘 익은 오디를 따 먹기 시작한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작은 오디를 하나하나 따서 입으로 가져가자니 손이 입보다 훨씬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한참 따먹다 보니 팔도 아프고 턱도 지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오디는 더 먹고 싶으니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책가방을 뒤적뒤적 하니 라면땅 과자 봉지가 보인다.
친구가 과자를 나누어 주면서 부스러기가 남은 봉지 째 준 것이다.
남은 부스러기를 입에 털어 넣고 오디를 따서 과자 봉지에 담기 시작한다.
오디가 다닥다닥 많으니 과자 봉지가 금세 가득 찬다.
과자봉지의 입구를 모아잡고 뱅뱅 돌려서 한 손으로 꼭 눌러 잡는다.
오디로 꽉 찬 봉지가 터질 듯 팽팽하다.
아랫쪽의 한 쪽 모서리를 이로 조심스럽게 뜯으니 오디 즙이 주르륵 흐른다.
얼른 입을 대다가 턱으로 목으로 오디즙이 묻어버린다.
과자봉지 모서리에 입을 댄 채 손등으로 턱을 쓰윽 닦고 본격적으로 오디즙을 빨아먹기시작한다.
달콤한 오디즙이 입 안에 가득 차니 꿀꺽꿀꺽 목으로 넘기며 100% 오디과즙을 맘껏 즐긴다.
헐렁해진 봉지를 주물러 오디즙을 한껏 짜서 끝까지 다 짜먹고 봉지를 열어보니 수분을 다 빼앗긴 오디 찌꺼기들이 패잔병처럼 뭉쳐있다.
이런 생각을 왜 이제야 했을까 하며 기분 좋은 뿌듯함에 어깨가 한껏 부푼다.
입가와 손을 씻으러 개울로 내려가서 개울물에 비친 얼굴을 보니 여기 저기 오디즙이 묻어 얼룩덜룩하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세수부터 하고 턱이며 목을 박박 씻어 얼룩을 지운다
집에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은 검은 내 입을 보고 오디 깨나 먹었구나 하며 웃는다.
날마다 익어가는 오디를 날마다 먹을 수 있어서 날마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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