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의 세상보기
느긋한 늑대 / 2025. 11. 9. 15:42 / 병마골 이야기

추수를 끝낸 논은 휑뎅그레하다.

봄부터 어린 모들로 가지런히 채워졌던 논은 여름이 되면서 늘어난 벼 포기로 빈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초록으로 가득한 논은 가끔 이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릴 뿐, 겉으로 보기에는 고요하지만 살짝 들여다보면 굉장히 분주하다.
우렁이들이 낸 길을 따라 각종 곤충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가끔 출몰하는 까만 물닭의 횃질에 화들짝 몸을 감춘다.
개구리밥도 부지런히 면적을 늘려가고, 소금쟁이는 개구리밥 사이로 미끄럼을 타며 제 시간을 즐긴다.
무당개구리가 펄쩍 뛰면 잔잔하던 논물이 작은 파장을 멀리 보내며 동그란 물자국들을 여러 개 만들어낸다.
아버지는 매일 이른 시간에 논을 돌아보러 나가신다.
논으로 들어가는 물이 막힌 곳은 없는지 살피고  멧돼지들이 짓밟아 무너진 논둑을 다독다독 두드려 다져 놓으신다.
두더지나 들쥐가 파 놓은 굴도 메우고 밟아 단단하게 다져놓고 병충해가 생기지는 않는지 세심하게 살피신다.
비가 많이 올 때면 만사를 제쳐놓고 논으로 달려가서 온 몸이 비에 흠뻑 젖고 세찬 비에 연신 얼굴의 빗물을 훔쳐내면서 삽으로 물길을 파서 논의 벼들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하느라 온 힘을 쓰신다.
밤새 비바람에 시달린 벼들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면 하루 종일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워 묶느라 진땀을 빼기도 한다.
이렇거 온갖 정성을 들이고 노심초사 돌본 벼들은 그간의 노고에 보답하기라도 하는 듯  가을바람에 튼실하게 잘 여물어서 황금빛을 반짝이며 기분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벼가 여물어 갈 때면 내내 채웠던 물을 완전히 빼내어 논바닥을 꾸덕하게 말린다.
알갱이를 단단하게 채운 벼들이 그 무게에 고개를 숙이면 벼베기가 시작된다.
한줌씩 잡고 낫으로 밑둥을 베면 사각사각하는 소리과 베어지는 느낌이 참 좋다.
다 베어낸 벼는 볏단으로 묶어서 쌓아올린 다음 영양분 가득한 따뜻한 가을 햇볕에 며칠 말린 후 탈곡을 위해 집으로 나른다.
나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텅 빈 논을 샅샅이 살피며 떨어진 벼이삭을 줍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 같은 빈 논에서 생각보다 많은 벼이삭을 줍고 나면 보너스를 받은 것 처럼 기분이 좋다.

찬서리가 살짝 내린 초겨울 어느 날, 대강의 가을걷이를 마친 우리집 식구들은 농사 짓느라 고생한 몸에 보양을 하기 위한 특식을 먹기로 한다.
그 특식은 논 한 구석에 있다.
양동이와 목장갑, 삽을 갖추고 추수를 끝낸 논으로 간다.
모든 논바닥이 다 말라서 단단한데, 한군데는 물이 고여있다.
갯벌처럼 거무스레한 흙 위로 살짝 덮인 물에 기름기가 돌고 그 기름진 물에 무지개가 서려있다.
민물에 기름기가 서린다는 것은 저 물렁한 논에 뭔가 생물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지를 한껏 걷어 올리고 맨발로 그 곳으로 들어간다.
오빠랑 아버지가 삽으로 흙을 마구 퍼올리기 시작한다.
논바닥 여기저기에 퍼올려진 검은 흙덩이 사이로 뭔가 꿈들거리는 것들이 보인다.
여름 내내 논바닥 속에서 힘을 키우고 겨울을 지내기 위해 영양을 가득 채운 미꾸라지다.
언니들과 나는 양동이를 들고 흙을 헤친다.
등이 검고 배가 노란 토종 미꾸라지들이 흙 속으로 숨으려는 몸짓이 바쁘고 다급하다.
잡았다 싶으면 손가락 사이로 매끌거리며 빠져나가는 바람에 쫓다가 미끄러운 흙에 꽈당 넘어지기가 일쑤다.
미끄러워서 미꾸라지인가보다.
목장갑을 끼고 반드시 잡겠다는 단호함으로 입을 앙다물고 이리저리 숨는 미꾸라지들을 향해 과감하게 몸을 던진다.
잡으려는 자와 숨으려는 미꾸라지들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삽으로 퍼올리기가 끝나면 웅덩이가 된 그 곳으로 직접 들어간다.
쑥쑥 빠지는 흙이 발가락을 간질인다.
미끌어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며 비틀비틀  발을 옲기다 보면, 발가락 사이로 꿈틀거리는촉감이 잡힌다.
잽싸게 손을 넣어 잡아올리니 제법 굵직하다.
한나절을 미꾸라지와 씨름을 하니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몸에 힘도 빠지면서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든다.
양동이를 들여다보니 굵직한 미꾸라지가 그득하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서 이만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여름 내내 농사 짓느라 굵은 땀을 흘리며 고생한 우리 식구들이 추어탕을 먹고 몸보신이 되어 건강하게 겨울을 보낼 것이니 기분이 참 좋다.
나는 입이 짧은 편이라 잡은 미꾸라지를 먹지는 않았으나 잡는 재미를 봤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좋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굴뚝에 연기가 피어 오른다.
추어탕을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작은 오두막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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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10. 26. 16:53 / 병마골 이야기

아침에 일어나 밖을 나가보니 코 끝이 싸아하니 차갑다.
울타리를 타고 올라간 강낭콩도 콩깍지가 누렇게 달라졌다.
지붕위에 덩그러니 올라앉은 박도 바가지를 만들 날이 멀지 않았다.
바짓가랑이에 닿는 아침 이슬에 소름이 돋는 쌀쌀함을 느끼며 학교에 간다.
논두렁을 지나가는데 여기 저기서 툭툭 기척이 보인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메뚜기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방아깨비도 덩달아 뛴다.
오늘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메뚜기를 잡으러 가야겠다.
벌써부터 가슴이 팔딱거린다.
수업도 건성건성 듣고는 고무줄 놀이 하자는 친구들의 말도 뿌리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올려뛴다.
평소 같으면 고무줄 놀이는 다른 일 보다 앞서는 유혹적인 제안이지만, 오늘 만큼은 메뚜기를 잡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다.
집에 오자마자 책보를 팽개치듯 풀어놓고 빈 술병 큰 것을 찾아 들고 논으로 달려간다.
선선한 가을 바람과 쨍한 가을 햇빛을 받고 제 속을 착실하게 채운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니 여름 내내 물 관리하고 풀 뽑아주며 애지중지 보살핀 아버지의 땀이 좋은 결실을 맺는 것 같아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논 바닥은 벼가 여물어 갈 무렵부터 물을 뺐기 때문에 그냥 들어가도 발이 젖을 리 없다.
논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논둑에서부터 메뚜기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니 벌써부터 눈과 손이 바빠진다.
아직은 초록을 띠는 풀과 색이 비슷한 메뚜기는 뛰기 전에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리저리 풀을 건드리면 놀란 메뚜기가 폴짝 뛰면 조심조심 다가가서 순식간에 낚아채야한다.
좁은 논둑에서 한참동안 메뚜기도 뛰고 나도 뛴다.
논둑을 다 휘저은 나는 논으로 들어간다.
벼가 쓰러지지 않게, 벼이삭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살금살금 메뚜기 사냥을 계속한다.
허리춤까지 차는 벼들이 내는 사락사락 소리는 나를 응원해 주는 것 같아서 신이 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메뚜기를 잡다 보니 어느새 유리병에 메뚜기가 그득하게 찬다.
병 속의 메뚜기들은 밖으로 나오려고 기를 쓰지만 미끄러운 유리병을 기어오르지 못하니 병의 입구를 굳이 막지 않아도 괜찮다.
간혹 덩치가 큰 방아깨비가 끼어 있어서 자리가 좁다고 서로 몸을 부대끼고 밀치며 아우성이다.
메뚜기가 가득 찬 병을 무겁게 들고 집으로 오니 아버지랑 언니가 애썼네 하며 웃으신다.
언니는 내게서 메뚜기를 건네받아서 씻어 오겠다며 개울로 간다.
나는 언니 뒤를 쫄래쫄래 따라간다.
언니는 망자루에 메뚜기를 넣은 다음 자루 째 개울물에 담그고 이리저리 휘저으며 메뚜기에 붙어있을 먼지나 잡티를 씻어낸다.
한참을 그렇게 휘저은 자루를 꺼내어 탁탁 털고 집으로 와서 화롯불 위에 구멍쇠(거치대)를 얹은 후 그 위에 커다란 후라이팬을 올려 놓고 메뚜기를 볶을 준비를 한다.
이글거리는 화롯불에 프라이팬이 달궈지면 들기름을 두르고 메뚜기를 와르르 쏟아넣는다.
커다란 쟁반을 프라이팬 뚜껑 삼아 덮고 메뚜기가 튀어오르는 것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들 볶기 시작한다.
갈색으로 바삭하게 볶아지면 소금을 살짝 넣어 간을 하면 완성이다.
입 안에서 바삭하게 부서지면 고소하고 담백한 것이 아주 맛있는 별식이다.
가끔 보이는 방아깨비도 색다른 맛이다.
1년 중 이맘때만 먹을 수 있는 터라 단백질이 가득한 메뚜기볶음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나의 가을은 고소하고 달콤하고 따뜻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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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10. 16. 20:08 / 병마골 이야기

화장실이라고 하면 의레 냄새 나고 더럽다는 생각부터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변소라고 불렀던 산골의 화장실은 불편하기는 해도 냄새로 얼굴을 찡그리는 일은 없다.
우선 집에서 뚝 떨어져 큰마당 끝에 독립적으로 있다.
굵직한 돌과 흙으로 어른 가슴 정도의 높이로 디귿자 담장을 두른다.
나머지 쪽은 싸리나무를 촘촘히 엮어서 울타리처럼 벽을 만든다.
엉성해 보이기는 해도 일부러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한, 밖에서 안이 잘 보이지 않는딘.
내 생각에는 아마도 사방을 흙벽으로 하면 통풍과 환기가 어려워져서 공기가 잘 통하라고 이렇게 만들었나보다.
세 면의 벽 중에 한 쪽은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공간을 내고 거적으로 막은 문이 있다.
비록 잠금장치도 없고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거적데기가 펄럭이기도 하지만 큰 불편함은 없다.
누군가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큰 기침을 어흠! 해서 인기척을 내면 된다.
변소의 내부는 작은 방 한칸 정도의 면적에 넓적하고 편평한 돌이 변소 중간 정도에 세 개가 간격을 두고 놓여있다.
간격은 사람이 용변을 보기 위해 앉기에 적당한 폭으로, 가운데의 돌은 양 쪽의 돌보다 훨씬 더 넓적하다.
그 이유는 언니랑 둘이 같이 볼일을 볼 때 언니의 발과 내 발이 나란히 놓이기 위함이다.
디딤돌 앞에는 화로에서 식은 재가 한가득 있다.
디딤돌 가장 안쪽의 벽면에 작은 선반이 있고, 그 위에는 다 쓴 공책이나 읽지 않는 책, 신문지 등, 휴지를 대신할 종이가 있다.
부드러운 휴지가 아닌 거친 종이로 뒷처리를 어찌 할까마는, 원래부터 이렇게 해 온 우리는 종이를 비벼서 부드럽게 한 다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사용한다.
볼일을 다 보면 벽연에 세워놓은 작은 삽으로 앞쪽의 재를 한 삽 떠서 용변 위를 두툼하게 덮은 다음 삽으로 밀어 변소 뒷쪽으로 보내면 된다.
이렇게 모인 인분은 재와 섞여서 훌륭한 거름으로 다시 재탄생 한다.
재를 뿌리면 신기하게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아 온 조상들의 지혜에 탄복하곤 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화로 안에 남아 있던 불씨의 온기에 따뜻하게 용변을 본다.
가끔은 도꾸녀석이 따라들어와서 물끄러미 볼 때도 있다.
아무리 나가라고 혼을 내도 꿈쩍도 않던 녀석이 밖에서 나는 닭들의 소리에는 부리나케 쫓아나가기도 한다.
그런 날은 용변을 다 본 후에 도꾸를 혼내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날이다.
대낮이야 무서울 일이 전혀 없으나 캄캄한 한밤중에는 변소에 가는 것이 좀 무섭다.
변소 다락에서 귀신이 빨간휴지른 줄까 파란휴지를 줄까 하면서 휴지를 늘어뜨린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더더욱 혼자 가는 것이 무섭고 싫다.
우리집 변소 다락에는 아버지의 농기구들이 올려져 있고, 저 깊은 구석에는 우리집 고양이 나비의 보금자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이다.
소변이야 외양간 뒤 두엄밭에서 해결하면 되지만 대변은 정말 골치다.
어쩌다가 한밤중에 변소에 가게 되면 한창 잘 자고 있는 언니나 오빠를 깨워서 동행을 부탁한다.
언니나 오빠가 변소 밖에서 지켜 주면 안심이긴 하나, 혹시라도 춥거나 졸려서 들어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계속 거기 있어? 하면서 물어본다.
처음 몇 번은 대답을 잘 해주다가 계속 물어보면 귀찮은지 대답을 하지 않기도 한다.
그럴때면 갑자기 몰려오는 무서움에 서둘러 뒷처리를 하고 넘어질 듯 달려나온다.
밖에서 기다리던 언니나 오빠는 으이구 겁쟁이~ 하면서도 내 손을 꼭 잡고 방으로 들어온다.
가을이 깊어지면 변소 뒤꼍에 흐드러지던 빨간 꽈리도 그립고 지붕 위에서 뒹굴대던 박도 생각난다.
우리집 변소는 변소의 기능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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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10. 8. 15:19 / 병마골 이야기

맑은 하늘에 밝게 떠오르는 달이 점점 동글동글해 지더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추석을 맞이한다.
며칠 전부터 명절 준비에 분주한 날을 보낸다.
차례상에 올릴 햅쌀을 수확하고 대추며 밤이며 모두 가장 크고 모양도 예쁘고 빛깔도 좋은 것으로 골라서 준비한다.
아버지는 장에 가셔서 조기와 북어 제례용 과자와 약과 등등, 차례상에 필요한 이것저것들을 한 짐 지고 오신다.
내가 추석을 기다리는 여러가지 이유 중 한 가지는 아버지의 짐보따리에 있다.
보따리의 맨 아래에는 설과 추석에만 받을 수 있는 옷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빔은 빨간 바지다.
바지 하단 바깥쪽에 꽃을 수놓은 예쁜 바지를 보고 입이 함박만하게 방그러진다.
새옷을 곱게 접어 옷장에 소중하게 보관해놓고 추석날까지 날마다 들여다보고 매만진다.
추석이 임박하면 본격적으로 명절 준비로 바빠진다.
베어서 말린 벼를 털어서 도정도 해놓고 송편을 빚을 쌀도 불려서 디딜방아로 찧어 가루를 만든다.
아침마다 목털과 날개를 푸덕이던 닭도 안됐긴 하지만 한 마리는 희생해야 한다.
추석 전날, 새벽에 일어나 두부를 만들어 놓고 송편을 빚을 준비를 한다.
언니가 쌀가루를 반죽하는 동안 나와 네째언니는 뒷산으로 가서 솔잎을 바구니 가득 따서 가지고 온다.
송편을 찔 때 솥 안에 솔잎을 깔고 그 위에 송편을 놓고 찌면 송편에 솔잎향이 그윽하게 배어서 참 좋다.
그 외에도 솔잎이 살균 역할도 한다니 두루두루 좋다.
반죽이 다 되어 마루에 주욱 둘러앉아 송편을 빚을 준비를 한다.
나도 빚고 싶은데 아직은 어려서 안된단다.
서운한 빛이 얼굴에 가득한 나를 보고 아버지가 밥 많이 먹고 쑥쑥 크라고 하신다.
나는 서운한 마음을 누르고 언니들이 빚는 송편을 큰 쟁반으로 옮겨 놓는 등 잔심부름을 한다.
아버지는 꽃밭에서 맨드라미 꽃을 한 줌 따서는 송편에 얹자고 하신다.
나는 나도 할 일이 생겨서 얼싸 좋다 하면서 꽃을 조금씩 잘라서 송편 한 가운데에 올리고 꼭꼭 누른다.
하얀 송편 밭에 진한 분홍색 꽃이 가득하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맨드라미를 꽂으니 송편이 한층 더 예뻐보인다.
아버지는 언니들 틈을 기웃기웃 하시더니 나도 빚어볼까 하시며 틈을 비집고 앉으신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하는 눈빛으로 서로 마주보다가 신기한 일이라며 슬쩍 웃음을 짓는다.
아버지는 언니들이 빚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반죽을 덜어서 송편을 빚기 시작하신다.
동글동글 굴리다가 엄지를 푹 박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반죽을 돌려가며 소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고 흰 팥소를 넣은 후 반죽을 아무리는 것까지는 쉽게 하신다.
그런데 그 다음 모양을 내는 단계에서 난관에 봉착하신 듯 하다.
양 손으로 반죽을 옮겨가며 꼭꼭 눌러 손가락 모양을 내고 양 끝이 날렵하게 올라간 배 모양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리 이리저리 해봐도 도대체 모양이 나지를 않는다.
한참을 주물럭대며 애쓰시던 아버지는 결국 넓적한 만두모양으로 마무리를 하시며 두 손을 털고 일어나신다.
예쁘고 단정한 송편들 사이로 쑥개떡처럼 넓적한 송편 하나가 그래도 맨드라미 꽃을 꽂은 채 존재감을 뽐낸다.
언니들은 흘끔흘끔 돌아보며 아버지 몰래 쿡쿡 웃는다.
무쇠솥 안 솔잎 위에서 쪄진 송편은 맨드라미 물이 바알갛게 들어서 참 예쁘다.
추석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맛있는 밥을 먹고 엄마 묘소에 성묘를 다녀온다.
아버지의 송편은 아버지가 드시라고 했더니 내게 주시며 영광스럽게 먹으라고 하신다.
모양이야 어떻든 아버지가 빚은 단 하나의 떡이라 그런지 쫄깃하고 맛있다.
나는 추석빔으로 받은 빨간 바지를 입고 가을 볕에 반짝거리며 큰집에도 다녀오고 친구들도 보러 다닌다.
이 바지는 가을 내내 입을 것이다.
나의 추석은 빨간 바지와 바알간 물이 들은 넓적한 송편, 아버지, 오빠, 언니들과 함께 맛있는 명절음식을 먹고 깡총거리며 성묘를 다녀오고 앞산에 둥실 떠오른 둥근 보름달을 보면서 나도 둥실 떠오르는 기분 좋고 행복한 기억으로 가끔 꺼내어 보는 추억 수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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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9. 30. 17:18 / 병마골 이야기

밤은 어떻게 먹던지 참 맛있는 견과이다.
초여름 무렵 길고 보송한 꽃을 피우며 밤은 가을을 준비한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밤꽃은 질 때면 송이 째 툭! 떨어진다.
옅은 갈색으로 변해 떨어진 밤꽂은 산골 아이들에게는 좋은 장난감이 된다.
길이가 대략 20센티 쯤 되고 전체가 작은 꽃잎으로 덮여서 만지면 보송보송 하다.
연필 굵기의 밤꽃을 한 웅큼 주워 모아서 앞 부분을 동그랗게 묶고 반 뼘쯤 사이를 띄어 다시 한 번 묶으면 꼬리가 풍성하고 귀여운 다람쥐가 된다.
여러 마리를 만들어서 친구들과 이런 저런 놀이를 한다.
다람쥐 경주를 하기도 하고, 춤도 추게 한다.
꽃이 진 밤나무는 한여름이면 그 뜨거운 햇빛을 견디며 알밤을 품어 낸다.
더위가 서서히 떠나갈 준비를 하는 초가을이면 밤나무 가지들 사이로 작은 밤송이들이 열리기 시작한다.
뾰족한 가시들로 뒤덮여서 보기에는 따끔할 것 같지만 만져보먼 보들보들 부드럽다.
가을의 따끈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에 밤송이는 제 몸을 점점 키우며 안으로는 단단한 알밤의 속을 채운다.
가시들은 알밤을 지키기 위해 차츰 날카롭고 단단해진다.
논에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밭 작물들도 잘 익어가는 추석 무렵, 밤송이는 초록에서 갈색으로 변해가더니 햇볕을 잘 받은 밤송이는 성질 급하게 입을 쩍 벌려 알밤들을 내보인다.
갈색으로 반짝거리는 알밤 세개가 그동안 견뎌온 시간들을 오롯이 표현하면서 정말 예쁘게 옹송옹송 몸을 웅크리고 있다.
하루 이틀 날이 가면서 밤송이는 입을 더 벌리더니 알밤들이 툭툭 바닥으로 떨어져 풀 숲으로 숨어든다.
밤나무 한 그루에 아직은 초록색 밤송이, 갈색으로 변하며 입을 벌릴 준비를 하는 방송이, 쩍 벌어져 알밤들이 훤히 보이는 밤송이, 이미 알밤들을 내보내고 헛헛하게 웃는 듯 한 밤송이들이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가득 밤나무를 장식한다.
언니들과 나는 긴 장대를 가지고 밤나무를 털기 위해 출동한다.
긴 장대로 밤나무 가지 여기저기를 툭툭 치면 밤송이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튀어나온 알밤을 풀 숲 속에서 찾는 것은 알밤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 같아서 참 재미있다.
벌어진 밤송이를 양쪽 발로 힘주어 열어서 알밤을 꺼내기도 하고, 아직 초록색으로 입을 앙다물고 있는 밤송이는 발로 마구 비비다가 가시가 벗겨진 부분을 양쪽 발로 힘주어 벗겨서 속살이 연한 알밤을 꺼낸다.
막 꺼낸 알밤은 껍질이 연해서 이로 벗겨낸 후 속껍질을 손톱으로 밀면 보얗고 예쁜 밤이 세 겹은 껍질에 쌓여있던 귀한 모습을 드러낸다.
입 속에 넣고 깨물면 아작아작 하고 고소한 햇밤의 향이 저절로 웃음이 날 만큼 맛있다.
부지런히 까서 언니들 입에도 넣어주고 나도 먹느라 맛있게  바쁘다.
둘째 언니가 씩씩하게 나무로 올라가면서 이제부터 나무를 흔들어서 밤을 털 것이니 모두들 나무 밑에서 나가라고 한다.
다른 언니들은 모두 서둘러 나가는데, 나는 설마 맞기야 하겠어? 하면서 계속 밤을 찾아다닌다.
언니들이 어서 나오라고 하는데도 밤 줍는 재미에 빠져서 도통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나무 위에 올라간 언니는 모두 비켰겠지 하며 나무를 흔들기 시작한다.
밤송이들이 버티지 못하고 우수수 비오듯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 옆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밤송이들을 보니 살짝 겁이 난다.
어서 나가야지 하며 언니들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데, 머리로 툭! 밤송이가 떨어진다.
가시가 많은 만큼 따끔이 아니라 따따따끔 한다.
아얏! 소리를 지르니 나무 위에 있던 언니도, 나무 밖에 있던 언니들도 모두 놀라서 달려온다.
모두 내 머리를 살펴보면서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다.
잘 여문 밤송이의 위력은 결코 작지 않아서 맞은 부분이 바늘로 마구 찌른 것처럼 여러 군데에 핏방울을 내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머리에 박힌 밤가시를 뽑느라 바쁘면서도 언니들은 나를 달래느라 입도 바쁘다.
으앙~ 하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우는데 뭔가가 입으로 덜컥 들어온다.
우는 와중에도 궁금한지라 깨물어보니 고소한 알밤이다.
언니 중의 누군가가 얼른 밤을 까서 넣은 것이다.
머릿속은 핏방울이 송송 솟고,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는데 햇 알밤은 정말 맛있다.
밤송이에게 따끔하게 혼나고 먹으니 더 꿀맛이다.
밤이 그득하게 찬 소쿠리를 서로 들고가겠다고 다투는 언니들 틈에 끼어 날밤을 우적거리면서 집으로 간다.
밤가시를 뽑은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 주는 언니의 악손 덕분에 이제는 약간 얼얼할 뿐, 더이상 아프지 않다.
올해의 밤은 유난히 더 맛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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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9. 23. 10:32 / 병마골 이야기

산자락이 비스듬히 누운 아래로 길게 난 오솔길이 신작로로 거듭나서 차 두대가 비켜간 정도로 넓어졌다.
비스듬한 산자락에는 봉긋봉긋한 봉분들이 가득 들어찼다.
우리 동네의 공동묘지이다.
돌보는 후손이 없이 오래되어 잡풀이 무성한 무덤도 많고 깨끗하게 관리가 잘 되는 무덤도 있다.
너무 오래되어 거의 평지와 같은 무덤도 있고 일부가 허물어진 무덤도 있는 등, 모양도 상태도 크기도 제각각인 봉분들이 수 십기가 산자락에 가득하다.
산자락을 푹 깎아서 길을 넓힐 때, 혹시라도 묻혀있던 인골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무서웠었다.
대낮에 지날 때에도 그 쪽으로 돌아가는 시선을 애써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는 곳이니 날씨가 우중충 하거나 어둡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지나가기 싫은 곳이다.
제멋대로 자란 억새들이 바람에 쓸리며 서걱서걱 소리를  내면 귀신이 내는 소리로 들리고, 휘청거리는 키 큰 억새의 흔들거림도 귀신처럼 보여서 목덜미가 서리를 맞은 듯 선득거린다.
가끔 산토끼나 다람쥐가 툭 튀어나오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꽁무니 빠지게 뛰는 날도 심심치 않게 많다.
동물들이 다니면서 돌을 건드리면 굴러떨어지는 돌맹이가 얼굴 없는 달걀귀신으로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 앞을 지나다가 아름드리 옥수숫대가 가로막기도 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시커먼 뭔가가 풀 숲에서 노려봤다는 둥 이런저런 괴담과 목격담도 많아서 더 무서운 곳이다.
어느 가을날, 교육청에 선보일 고적대 연습을 하다가 하교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다.
그 곳을 지나야 하는 학생들은 학년 차이가 있는 남녀 일곱명이었다.
우리들이 동네 입구로 들어섰을 때 이미 날은 땅거미가 깔리면서 어둑해지고 있었다.
공동묘지는 동네의 중간 쯤에 있으니 그 곳에 당도하면 이미 주위는 캄캄할 것이다.
달이 뜨려면 한참 남았으니 어둠 속에서 공동묘지를 지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서로 팔짱을 단단히 끼고 가로로 넓게 서서 가기로 했다.
어둠 속을 천천히 걷다보니 어둠에 익숙해져서 어렴풋이 주변도 보이고 길도 보인다.
걷다보니 어느새 우리 모두가 원치 않는 그 곳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귀신이 무섭기는 하지만 다른 언니오빠들 보다 덜 무서워하는 편이라 슬쩍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그래서 소변이 마려워서 미리 앞서 뛰어갈테니 천천히 오라고 하고는 냅다 뛰어서 공동묘지 앞의 억새 속에 쪼그리고 앉아 숨어서 일행들을 기다렸다.
등 뒤에 무덤들이 즐비하니 등골이 오싹하다.
신경은 온통 등 뒤로 쏠려서 아주 작은 소리에도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마른 억새풀이 서걱거리고 짐승들이 내는 소리가 들리니 분위기는 더욱 음산하다.
천만년의 시간이 흐른 듯, 더디게 느껴지는 시간에 엉덩이를 자꾸 들썩이며 일행들이 언제 오나 고개를 빼어든다.
다행이 달이 뜨기 시작하면서 주변이 환해져 어지간한 사물도 다 보이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드디어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가까워진다.
일행들은 무서운 만큼 목소리를 키운다.
내 친언니는 특히나 귀신을 무서워하는지라 일부러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말하고 웃고 노래도 부른다.
일행들을 놀래킬 생각에 기분이 짜릿하다.
시끌시끌한 일행들이 내가 숨어있는 곳을 지나칠 때 흙을 집어서 일행들에게 뿌리기 시작한다.
일행들은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어리둥절 하다가  흙과 돌맹이가 날아오는 곳이 공동묘지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스크럼을 풀고 뛰기 시작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무릎을 치면서 깔깔거리고 웃는다.
한참을 배꼽빠지게 웃다보니 문득 혼자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갑자기 업습하는 무서움에 나도 꽁지가 빠져라 뛰기 시작한다.
뒤에서 귀신들이 쫒아올 것만 같아서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귀에서 바람소리가 날 만큼 빠르게 뛴다.
평소에 달리기를 잘 하는 만큼 앞서 간 일행들을 곧 따라잡는다.
두 서너 모퉁이를 뛰고서 일행들은 숨이 턱에 차서 길에 주저앉는다.
얼마나 정신들이 없는지 내가 언제부터 같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끌고 집으로 가는 내내 본인들이 느낀 이야기들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계획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심하게 놀란 일행들을 보고 차마 내가 한 짓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이 분위기를 봐서는 사실을 알게되면 집단폭행도 부족할 만큼 놀란 것 같으니 당분간은 입을 다물어야겠다.
그런데 나중에 기회를 봐서 이실직고를 하고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끝내 기회를 잡지 못해서, 다 큰 어른이 된 동네 언니들과 오빠, 동생들이 괴담으로 가끔 이야기를 한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장난을 너무 심하게 쳤나 하는 미안함도 있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옛날의 추억도 함께 묻어 나올테니 추억 마중물 역할로 충분하다는 뻔뻔함도 보인다.


느긋한 늑대 / 2025. 9. 12. 19:04 / 병마골 이야기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아침 해를 받아 반짝거리는 이슬은 영롱한 보석같다.
나뭇잎에서, 바위를 덮은 이끼에서, 풀잎에서, 해에게 받은 일곱가지 색을 받아서 저마다 다른 색을 뽐내던 이슬들은 해가 조금 더 높이 떠오르면 땅 속으로 몸을 숨긴다.
새벽에 조용히 다시 나와서 아침에 뜨는 해와 또 다시 숨바꼭질을 할 준비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재촉한다.
좁은 길 양쪽에 무성하게 늘어진 풀들도 이슬을 함박 품고 있다가 내 발길에 후드득 이슬을 떨구어낸다.
길이 안보일 정도로 무성한 풀들 때문에 내 바지는 아침마다 흠뻑 이슬에 젖곤 한다.
풀들이 내 다리를 휘감아 길을 가로막고 나를 못 가게 잡는 듯 해서 걷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사락사락 다리를 스치는 풀은 촉감이 간질간질해서 재미있다.
바지가 무릎 높이까지 축축해졌지만 젖은 느낌이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비에 젖거나 물에 빠졌을 때 젖는 느낌과 많이 다른 걸 보면 아마도 이슬은 물을 닮은 보석이 틀림없는 것 같다.
좁은 산길에서 빠져나와 신작로를 지나는 동안 젖은 바지도 어지간히 물기가 말라간다.
뒤를 돌아보니 길을 덮은 풀들이 휘휘 손을 흔들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는 것 같다.
풀들과 인사를 나누고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머리를 탁! 치는 아이디어가 생각난다.
평소에 나를 놀리고 괴롭히던 친구 녀석을 곯려줄 아이디어가 내 발길을 가로막던 풀을 보고 떠오르다니!
학교에 가서 수업하는 내내 선생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친구에게 복수할 생각만 머리 속에 가득하다.
드디어 기다리던 학교 종이 울리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을 나선다.
고무줄 놀이를 하자는 말도, 공기놀이를 하자는 것도, 사방치기를 하자는 솔깃한 유혹도 오늘은 소용이 없다.
친구 보다 먼저 가야 하는 조급함에 뜀박질로 생각해 둔 곳까지 뛰어간다.
내 복수를 해 줄 곳은 좁고 풀이 무성한 길이 곧게 한참 뻗어 있는 곳이다.
숨이 헉헉 찼지만 쉴 틈도 없이 바로 작전에 돌입한다.
서너 걸음 정도에 한 번씩 풀을 한 줌씩 길 양쪽에서 잡고 서로 묶어놓는다.
한번 묶으면 어른이 힘껏 힘을 써야만 뜯길 정도로 질긴 풀이라 오늘의 작전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서너 군데를 묶어 놓고 친구가 오기를 기다린다.
한참 후에 노래를 부르며 오는 친구가 보인다.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또 놀리길 시작한다.
평소 같으면 화가 나도 내가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참아야 했지만, 오늘 만큼은 다르다.
나도 질세라 온갖 말로 약을 올리기 시작한다.
그 친구는 처음에는 의외의 내 반응에 놀라는 것 같다가 이내 화가 나서 나를 쫓아오기 시작한다.
제발 풀이 묶인 것을 눈치 채지 말아야할 텐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본다.
친구는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매일 걷는 길이라서인지 길을 살피지도 않고 마구 뛰어온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며 지켜본다.
첫 번째 매듭에서 덜컥 걸려 넘어진다.
얏호~~ 걸려들었다.
친구는 처음에는 그냥 넘어진 줄 알았는지 여전히 씩씩거리며 다시 뛰다가 두 번째 매듭에 다시 걸려 넘어진다.
나는 너무 통쾌해서 박수를 치며 폴짝거리며 웃는다.
친구녀석은 그제서야 내가 부비트랩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더 크게 화를 내며, 그렇지만 앞을 살피면서 또 뛴다.
그럴줄 알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사이를 크게 벌려 놓았지~
조심조심 뛰던 친구는  더 이상 매듭이 없는 줄 알고 힘껏 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몇 걸음 못 뛰고 다시 걸려 넘어진다.
나는 작전이 완전히 성공해서 그동안 당했던 분풀이를 시원하게 했다는 생각에 통쾌한 웃음을 크게 웃는다.
어! 그런데 몸을 일으킨 친구의 코에서 두 줄기 붉은 액체가 흐르기 시작한다.
코피를 쓰윽 닦은 친구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나는 친구의 코피를 보니 겁이 더럭 난다.
주저앉아 우는 친구를 지나쳐 묶어놓았던 풀들을 풀어놓고는 집으로 줄행랑을 친다.
오는 내내 코피를 흘리며 우는 친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동안 당했던 수많은 사건들을 떠올리며 당해도 싸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날 저녁, 친구의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오신 친구의 엄마에게 아버지는 거듭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했다.
양쪽 무릎에 반창고를 붙이고 팔뒤꿈치에도 쓸린 상처가 벌겋게 남아있는 친구는 아버지 뒤에 숨은 나를 보면서 눈을 부라렸지만, 나는 이제는 친구가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친구와 친구의 엄마가 돌아간 후, 나는 아버지께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죄송해요 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시던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실 뿐, 아무 말씀도 없다.
그날 이후로 그 친구는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으니 내 작전은 정말 통쾌하게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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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9. 10. 17:36 / 병마골 이야기

천지를 녹일 듯 뜨겁던 강렬한 햇빛도 차츰 누그러져가고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하늘은 깨끗하게 걸레질이라도 한 듯, 진하고 파랗고 높다.
이제 가을걷이로 서서히 바빠질 때가 다가온다.
나는 엊그제 땅벌에 쏘여서 한 쪽 팔이 어깨까지 퉁퉁 부었다.
저녁 나절, 아버지의 일손을 거들겠다고 낫을 들고 논두렁 옆 나대지에 무성한 풀을 베러 간 것이 화근이었다.
풀이 시들해지기 전에 신선한 풀을 소에게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는 기특한 생각이었건만, 가을이 되면서 독해지는 벌레들을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다.
땅벌은 땅 속에 집을 짓고 살아서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정말 주의해야한다.
싱싱한 풀을 보고 신나서 베는데 땅속에서 뭔가가 풍겨올라왔다.
순간 먼지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떼로 날아오르는 무서운 땅벌이었다.
낫을 내팽개치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뛰었지만, 오른쪽 손목에 악착같이 붙어서 쏘는 녀석을 미쳐 떼어내지를 못하고 결국 쏘이고 말았다.
퉁퉁 부어오른 손목을 본 아버지는혀를 끌끌 차시며 박혀있던 침을 다 빼고 꿀을 발라주신다.
꿀이 약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가 발라주시니 금방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꿀을 발라놓으니 개미도 자꾸 기어오르고 파리도 달려들어서 여간 귀찮은게 아니다.
하룻 밤 자고 나면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웬걸 어깨까지 퉁퉁 부어서 통증까지 심하니 큰 일도 이런 큰 일이 없을성 싶다.
아버지랑 언니, 오빠는 내 팔을 보면서 그 큰 팔로 소도 때려잡겠다고 놀린다.
나는 욱신거리고 아프기도 하지만 움직임이 둔하고 불편한데 다들 놀리고 웃으니 서운하기도 하고 약이 올라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아버지는 조금 미안했는지 호박잎을 따서 두 손으로 비빈 다음 내 팔에 척 걸쳐주신다.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좀 나아진 김에 집 앞 논 건너 산 아래 가을고사리나 꺾어볼까 하고 다래끼를 허리춤에 차고 나선다.
논둑길을 막 들어서는데 건너편 풀숲에서 뭔가 펄쩍펄쩍 뛰는 것이 보인다.
멀리서 보니 새끼줄 같은 것이 뛰어올랐다가 풀숲으로 들어갔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궁금해진 나는 좁은 논두렁을 가로질러 뛰어간다.
논두렁 중간쯤 갔을 때 뛰고 있는 것이 뭔지 뚜렷하게 보인다.
길이가 짧고 굵은 독사가 펄쩍펄쩍 뛰고 있다.
깜짝 놀라서 도로 집으로 뛰어들어간다.
허겁지겁 들어오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왜? 물어보신다.
"아부지~ 뱀이 뛰고 있어요. 춤추는 것 같기도 해요!"
아버지는 내가 가리키는 쪽을 보시더니, 뱀이 뭔가 단단히 약이 오른 것이라고 하신다.
뱀이 화가 많이 나면 몸집이 굵어지고 길이가 짧아진 채 길길이 날뛰는 것 처럼 뛴다고 하신다.
뭐가 약을 올렸기에 저렇게 펄쩍펄쩍 뛰는 건지 자못 궁금해졌지만 차마 확인하러 가지는 못하겠다.
뱀도 가을이 되면 독이 강해진다고 하니 잘못 물리면 땅벌에 쏘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있을테니 당분간은 정말 조심해야겠다.
가을고사리는 포기를 하고 날뛰는 뱀을 한참동안 구경하느라 팔의 통증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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