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성을 부리던 무더위가 순해졌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공기가 참 반가워서 친구랑 동네 뒷산을 올랐다.
부드러운 흙길이 주는 기분 좋은 감촉과 가을 풀벌레들의 하모니는 산책하는 내내 행복함을 느끼게 한다.
살짝 힘들다 싶을 때, 적절하게 벤치가 보인다.
이런 저런 밀린 수다를 풀어가고 있는데, 길고 가느다란 익숙한 풀 한다발이 눈에 띈다.
사람 머리카락을 연상하게 하는 저 풀은 어릴 적 시골에는 참 흔한 풀이었다.
친구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관심을 보인다.
이름을 물어보는데, 그러고보니 여태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시골에는 이름도 모르고 대하는 풀, 꽃, 나무가 훨씬 많은데, 저 풀도 그렇다.
친구는 도시의 문명인은 이래야한다면서 어느새 검색을 하더니 '가는 잎 그늘사초' 라고 알려준다.
그러고는 손가락 빗으로 정성스럽게 빗질을 하고 땋기 시작한다.
나는 그런 친구에게 한마디 던진다.
"그 풀 그렇게 땋으면 귀신이 깃든다던데!"
말을 하고 나니 옛 추억이 아슴아슴 떠오른다.
가을 고사리를 꺾으러 곧잘 산에 오르던 어느 날,
아직 남은 더위에 목이 말랐던 나는 떡갈나무 잎을 고깔처럼 접어서 작은 골짜기에 쫄쫄 흐르는 물을 떠 먹고는 아무데나 풀썩 앉아서 다리 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 주변에는 가느다랗고 긴 풀이 풍성한 더미를 이루며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다.
흔하게 보는 풀이라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다 보니 마치 머리카락 같은 저 풀을 문득 땋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을 한주먹 쥐고 손가락을 갈퀴모양이 되도록 약간만 벌려서 빗을 대신해서 풀을 빗은 다음 세 갈래로 나두어 쫀쫀하게 땋아내려간다.
다 땋고 보니 정말 여자의 뒷통수 같다.
재미가 붙어서 하나 더, 한번 더 하나보니 열 군데도 넘는다.
한껏 만족한 나는 무릎에 붙은 검불을 툭툭 털고 스윽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보니 여러 명의 여자들이 땅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쩐지 섬찟해져서 고사리 꺾는 것은 뒤로하고 집으로 내달렸다.
마당에서 도리깨를 손질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뭐에 쫓기는 사람 같다며 웃으신다.
사람 머리카락 닮은 풀이 있어서 땋고 보니 무서워서 뛰어왔다고 하니. 아버지는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얼른 다시 가서 풀어! 얼른!" 하신다.
왜 그러실까? 의아하게 쳐다보니 사람의 머리처럼 만들어놓으면 진짜로 귀신이 달라붙는다고 하신다.
헉! 열 군데도 넘는데... 그럼 귀신이 떼로?
겁이 더럭 나서 힘든 줄도 모른 채 단숨에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나서 인지 더 사람의 뒷통수로 보인다.
귀신이 들어가면 풀더미가 고개를 돌린댔는데 심지어 몇 군데는 움직이는 것 같다.
귀신 얼굴과 마주칠까 싶어 너무 무서워져서 눈 앞이 캄캄해지고 손발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니 분위기가 더욱 음산하다.
부리나케 땋은 것들을 풀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풀은 엉켜서 잘 풀리지 않는데다가 마음만 급해서 손은 더디고자꾸 헛손질을 한다.
작은 나뭇가지나 억새 등이 몸을 슬쩍슬쩍 스치기라도 하면 귀신인가 싶어서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심장은 터질 것 같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데, 미처 풀지 못한 몇 군데 풀들이 고개를 돌리기 시작한다.
마음에 가득 찬 공포가 눈물로 터져서 부옇게 흐려진 시야에 고개를 돌린 귀신이 막 일어서려고 한다.
눈물을 닦고 다시 보니 다행이도 귀신이 아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손놀림이 바빠진다.
이를 악물고 정신없이 풀다보니 더 이상 땋은 머리가 없다. 드디어 다 풀었다.
해는 이미 서쪽 산 뒤로 넘어가서 주변이 어둑어둑 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싶었지만 온 힘을 다해서 집으로 뛰어 내려왔다.
그날 밤, 밤새 귀신에 쫓기는 꿈을 꾸었다.
그 이후로는 그 풀만 보면 고개를 돌리고 피해다니곤 했다.
'가는 잎 그늘사초'를 정성껏 땋아 내려가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나도 땋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귀신 뒷머리가 완성되었다.
쓰다듬고 매만지면서 옛날 얘기를 하다가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물론 땋은 풀은 다시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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