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훈련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밤에 들리는 총소리에도 익숙해지고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통금과 통제도 처음만큼 불편하지 않다.
우리집의 펌프를 군인들과 같이 쓰다보니 지하수가 고갈되어 끼긱거리면서 물이 나오지 않아 저녁때에는 작은 개울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야 하는 불편함도 있지만 물 긷는 것을 너도나도 도와주는 군인들이 많으니 그것 또한 괜찮다.
아버지는 장을 담그실 때 아예 군인들 몫으로 한 동이 더 하신다.
장이 잘 익어 군인들이 항아리 바닥까지 닥닥 긁어서 가져가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부엌부터 내 방, 고추장 된장 등등 여러가지로 편의를 봐주고 내어주니 그 고마움에 훈련이 끝나고 부대장님이 인사를 하러 오시기도 한다.
그런데 군인들에게 오히려 내가 큰 도움을 받는 사건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밍기적거리다가 버스를 놓칠 위기에 처한 나는 허둥지둥 뛰기 시작했다.
저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는 두 시간 후에나 오니 필사적으로 뛰어야한다.
아직 버스정류장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저만치 버스가 보인다.
타기는 틀렸구나 하고 절망적인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런데 군인 한 명이 내 무거운 가방을 낚아채더니 달리기 시작한다.
당황해서 쳐다보는데 또 다른 한 명이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한다.
얼결에 뛰어가며 보니 몇 명의 군인들이 버스를 막고 서 있다.
개울가에서 아침준비를 하던 군인들이 환호성과 떼창으로 응원도 한다.
이른 아침에 난데없는 소동으로 동네가 시끌시끌하다.
버스 기사 아저씨도 빙긋 웃으며 내가 끌려(?)오는 것을 재미있는듯 보시고 버스 안의 꽉 찬 학생들도 환호성을 지른다.
버스에 탄 후 안도감에 한숨을 쉬고 나니 창피함이 쓰나미로 몰려온다.
제각기 한 마디씩을 하는 선후배, 친구들의 입을 막고 싶다.
한동안은 보는 사람마다 인사처럼 그 날을 얘기한다.
그 이후로 아침마다 밍기적거리게 하는 귀찮음병이 사라졌다.
굉장한 단합력으로 기민하게 행동하여 나의 지각을 면하게 해 준 그 날의 군인아저씨들께 새삼 고맙다.
나라도 지키고 내 지각도 지켜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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