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의 세상보기
느긋한 늑대 / 2025. 6. 2. 17:10 / 병마골 이야기

앞산의 연둣빛 나뭇잎들이 나날이 초록으로 색이 진해진다.
한낮에는 제법 햇빛이 따끈따끈해서 자꾸 그늘을 찾게 된다.
논두렁에 가득 찬 풀 사이로 빼꼼빼꼼 보이는 빨갛고 앙증맞은 뱀딸기가 보석이 박힌 듯 예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이른 더위를 휘적휘적 헤치며 오는 터라 느릿하다.
길 이쪽 저쪽의 밭들은 제각기 여러가지 작물들을 보듬고 알차게 키워가느라 넓은 품을 한껏 펼친다.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누에를 키우는 터라 밭 가장자리에 뽕나무를 심은 집들이 많다.
어른 키 만한 뽕나무에 오디가 주렁주렁 열렸다.
초록색, 빨간색, 검정색이 섞여서 꽃이 핀 듯 예쁘다.
나무마다 달라서 어떤 나무의 오디는 검정색으로 잘 익은 오디들로 뒤덮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오디 만찬을 즐겨야겠다.
밭 주인 아저씨가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셨으니 명심하고 잘 익은 오디를 따 먹기 시작한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작은 오디를 하나하나 따서 입으로 가져가자니 손이 입보다 훨씬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한참 따먹다 보니 팔도 아프고 턱도 지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오디는 더 먹고 싶으니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책가방을 뒤적뒤적 하니 라면땅 과자 봉지가 보인다.
친구가 과자를 나누어 주면서 부스러기가 남은 봉지 째 준 것이다.
남은 부스러기를 입에 털어 넣고 오디를 따서 과자 봉지에 담기 시작한다.
오디가 다닥다닥 많으니 과자 봉지가 금세 가득 찬다.
과자봉지의 입구를 모아잡고 뱅뱅 돌려서 한 손으로 꼭 눌러 잡는다.
오디로 꽉 찬 봉지가 터질 듯 팽팽하다.
아랫쪽의 한 쪽 모서리를 이로 조심스럽게 뜯으니 오디 즙이 주르륵 흐른다.
얼른 입을 대다가 턱으로 목으로 오디즙이 묻어버린다.
과자봉지 모서리에 입을 댄 채 손등으로 턱을 쓰윽 닦고 본격적으로 오디즙을 빨아먹기시작한다.
달콤한 오디즙이 입 안에 가득 차니 꿀꺽꿀꺽 목으로 넘기며 100% 오디과즙을 맘껏 즐긴다.
헐렁해진 봉지를 주물러 오디즙을 한껏 짜서 끝까지 다 짜먹고 봉지를 열어보니 수분을 다 빼앗긴 오디 찌꺼기들이 패잔병처럼 뭉쳐있다.
이런 생각을 왜 이제야 했을까 하며 기분 좋은 뿌듯함에 어깨가 한껏 부푼다.
입가와 손을 씻으러 개울로 내려가서 개울물에 비친 얼굴을 보니 여기 저기 오디즙이 묻어 얼룩덜룩하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세수부터 하고 턱이며 목을 박박 씻어 얼룩을 지운다
집에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은 검은 내 입을 보고 오디 깨나 먹었구나 하며 웃는다.
날마다 익어가는 오디를 날마다 먹을 수 있어서 날마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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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29. 17:00 / 병마골 이야기

오늘은 우리 집 이사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차근차근 쌌던 짐을 옮기고, 나머지 물건들도  잘 챙겨서 마지막 리어카에 싣고 간다.
추억도 많고 정들었던 집을 떠나려니 섭섭해서인지 자꾸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새로 살 집에 도착하여 모두 자기 할 일을 하느라 바쁘다.
아버지는 큰 짐들을 자리잡으시고 언니들은 부엌 살림이며 광에 넣을 곡식들, 옷가지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아버지와 언니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심부름을 하느라 나름 바쁘다.
한나절을 바쁘게 움직이니 대강 짐들이 집으로 들어갔다.
물건들이 제자리를 잡으려면 며칠은 걸리겠다.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물 한대접을 들이키시더니 우리들에게 주먹만한 돌을 많이 주워오라고 말씀하신다.
"이삿짐 정리하다 말고 웬 돌?" 나는 그 말씀이 의아한데 언니들은 다 안다는 듯이 소쿠리를 들고 사립문 밖으로 나간다.
언니들을 따라 가서 나도 돌맹이를 주워 담는다.
세 언니가 돌들을 각자 들 수 있는 만큼 나누어 담아 들고 나는 윗옷을 벌려 몇 개의 돌을 담아들고 집으로 간다.
아버지는 울타리 안쪽에 흙을 고르고 계신다.
우리가 주워 온 돌을 아버지 계신 곳에 놓자, 아버지는 그 돌들로 테두리를 쌓아 네모난 공간을 만드신다.
금방 가로세로 2미터 정도의 작은 밭이 생겼다.
한잠 쪼그리고 작업을 하신 아버지는 허리를 펴시면서 뒷뜰에 모종이랑 씨앗이 있으니 가져오라고 하신다.
언니들이 후다닥 가지고 온 모종은 작은 새싹들이지만 뭔지 다 알겠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는 맨드라미, 채송화, 봉숭아, 붓꽃, 라이락, 작약, 백일홍, 사루비아 등등 작은 꽃밭이 더 작아보일 만큼 심을 것이 너무 많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물봉선화를 슬쩍 한구석에 심는다.
아버지는 꽃밭이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자 이번에는 집 뒤뜰로 가서 울타리 안쪽의 약간 비탈진 곳에 딸기를 가득 심으신다.
곧 하얀 딸기꽃이 피고 빨간 딸기가 초록 잎 뒤에 살짝 몸을 숨기고 깊은 속까지 잘 익어갈 것이다.
한동안 손에 발에 흙을 묻혔으니 개울에서 시원하게 씻고 마루에 털썩 앉아서 곧 피기 시작할 꽃 이야기들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삿짐 정리는 뒤로 미루고 꽃밭부터 만드시는 아버지가 어린 내 눈에도 멋있다.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모종들이 뿌리를 잘 내릴 때까지 개가 짓밟는 것도 감시해야 하고 병아리들이 흙을 헤치지 않게 관리를 잘 해야한다.
이른 여름부터 가을까지 예쁜 꽃들을 만날 날이 벌써부터 가슴 설레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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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23. 18:55 / 병마골 이야기

봄이 오면 산골 사람들은 산나물 뜯을 생각에 어서어서 나물들이 자라길 기다린다.
농사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긴 하지만 잘 손질해서 저장하면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반찬거리가 되는 나물 채취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에는 농사일을 하기에 불편한데다가 봄비에 산나물이 쑥쑥 크기 때문에 온 식구들이 산으로 총출동한다.
날씨가 맑아지면 다시 들일에 바쁜 식구들은 논으로 밭으로 나간다.
나는 농사일 보다는 산에 가는 것이 훨씬 재미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냅다 산으로 튈 준비를 한다.
산에 올라 여기저기 나물을 뜯을 생각을 하니 그만 설레서 준비하는 손길이 더디게 느껴진다.
다래끼를 허리춤에 차고 다래끼에 나물이 넘치게 찰 것을 대비하여 보자기도 허리에 질끈 묶는다.
도시락에 밥을 꾹꾹 눌러 담고 도시락 모서리에 고추장을 한 숟가락 퍼 담으면 밥 준비도 끝이다.
산에 오르니 지난 번 비 오는 날 한바탕 훑고 다녔는데도 그새 고사리며 취나물이 탐스럽게 자랐다.
허리를 펄 새도 없이 눈과 손이 바쁘다.
다래끼에 가득 찬 나물을 보자기에 옮겨담기를 몇 차례하니 보자기도 제법 무거워진다.
산비탈에 미끄러져 다시 기어오르기도 하고 여기저기 잡목들을 헤치며 돌아치다 보니 배가 고파진다.
비닥이 편평한 곳을 골라잡아 도시락 먹을 준비를 한다.
일단 목부터 축여야겠다.
아직은 연한 떡갈나무 잎을 따서 고깔 모양으로 접은 다음 쫄쫄쫄 흐르는 작은 계곡물을 떠 먹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밀나물싹, 잔대싹, 청미래덩굴싹 등을 한 줌 뜯어서 대충 툭툭 털고 도시락 뚜껑을 그릇 삼아 올려놓는다.
아차! 숟가락 젓가락이 없다. 급한 마음에 잊어버렸나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싸리나무가 보인다.
가지를 잘라 다듬어서 젓가락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싸리나무는 달콤한 향이 나서 밥맛을 더 좋게 해주는 것 같다.
나물을 고추장에 푹 찍어서 밥과 함께 한 입 가득 물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맛있고 행복하다.
밀나물 싹은 담백하고 씹는 맛이 좋고 잔대싹은 항긋하다.
그 중 제일 맛있는 것이 청미래덩굴 싹이다.
약간 쌉싸름한 맛이 있으나 기름진 느낌으로 부드럽고 상큼하다.
나물들의 제각기 다른 맛을 즐기면서 먹다보니 어느새 가득했던 도시락이 텅 비었다.
배도 든든하니 다시 나물을 뜯으러 돌아다녀볼까 한다.
보자기에 담은 나물이 한아름이 되어서야 집으로 내려간다.
나물의 무게에 발걸음이 휘청거리지만 기분은 한껏 좋다.
집이 저만치 보이기 시작하니 도꾸녀석이 기적을 느끼고 마구 달려온다.
도꾸한테 짐을 넘기고 싶지만 천방지축인 녀석이 짐을 지고 갈 리가 없으니 도리없이 장난끼 많은 도꾸의 방해를 받으면서 꿋꿋하게 집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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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16. 19:24 / 병마골 이야기

매일 만나는 앞산의 나뭇잎들이 연한 연둣빛에서 진한 초록으로 바뀌어 간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는 어린 벼들이 씩씩하고 힘차게 뿌리를 내리며 쑥쑥 커간다.
어린 벼들 사이로 개구리밥이 몽글몽글 귀엽게 비집고 들어서더니 어느새 논물을 가득 덮었다.
그 사이로 무당개구리가 고개를 쏙 뺐다가 다시 자맥질을 치며 개구리밥을 흩어놓는다.
우리 집 논은 개울과 좀 떨어져 있어서 작은 고랑을 파서 물길을 내어놓고 논에 물을 댄다.
그런데 봄 가뭄에 개울물이 적어지면 논으로 가는 물도 적어져서 늘 물이 넉넉하게 차 있어야 하는 논에 물이 말라가면 아버지의 속도 타들어간다.
아버지는 개울의 상류로 올라가 물이 고여있는 곳에서 부터 논까지 긴 비닐 호스를 연결한다.
지름이 대략 15센티쯤 되는 투명 비닐호스는 물이 잘 흐를 수 있도록  땅바닥도 고르게 다듬어야 하고 호스가 꺾인 부분은 없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호스 점검을 해야 하는데, 낙엽이 딸려 들어가 호스가 막히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낙엽으로 막힌 곳은 납작한 돌맹이로 낙엽을 꾹꾹 눌러 부수어 물이 흐를 틈을 열어주면 물길에 낙엽 잔해들이 흘러간다.
논까지 잘 오도록 돌맹이 마사지를 하고, 논에 도착해서 호스를 빠져나온 낙엽은 건져서 버리면 된다.
생각대로 잘 되지 않을 때도 많아서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지만 가끔 보너스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닥 싫지 않은 일이다.
오늘도 보너스를 기대하며 호스를 점검하러 간다.
호스를 따라 가기 시작하자 마자 호스에 갖힌 가재가 보인다.
물길을 거슬러 나가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지 이리저리 집게발을 휘저으며 나갈 곳을 찾고 있다.
돌맹이로 살살 뒤를 두드리니 앞으로 앞으로 간다.
가재를 몰고 가다보면 앞서 있는 또 다른 가재를 만나기도 한다. 이 가재가 나의 보너스이다.
긴 호스를 따라 허리를 굽히고 가재를 몰고 가자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
일어서서 하늘도 쳐다보고 풀밭에 앉아 쉬기도 하며 끈기있게 가재사냥을 한다.
논에 도착해서 호스를 빠져나온  가재를 긴 풀에 꿰어 보니 제법 여러 마리다.
줄줄이 꿴 가재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간다.
오늘은 가재를 넣고 시원하고 구수하게 끓인 된장찌개를 해달라고 할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오늘도 도랑치고 가재 잡았구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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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11. 11:56 / 병마골 이야기

군사훈련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밤에 들리는 총소리에도 익숙해지고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통금과 통제도 처음만큼 불편하지 않다.
우리집의 펌프를 군인들과 같이 쓰다보니 지하수가 고갈되어 끼긱거리면서 물이 나오지 않아 저녁때에는 작은 개울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야 하는 불편함도 있지만 물 긷는 것을 너도나도 도와주는 군인들이 많으니 그것 또한 괜찮다.
아버지는 장을 담그실 때 아예 군인들 몫으로 한 동이 더 하신다.
장이 잘 익어 군인들이 항아리 바닥까지 닥닥 긁어서 가져가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부엌부터 내 방, 고추장 된장 등등 여러가지로 편의를 봐주고 내어주니 그 고마움에 훈련이 끝나고 부대장님이 인사를 하러 오시기도 한다.
그런데 군인들에게 오히려 내가 큰 도움을 받는 사건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밍기적거리다가 버스를 놓칠 위기에 처한 나는 허둥지둥 뛰기 시작했다.
저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는 두 시간 후에나 오니 필사적으로 뛰어야한다.
아직 버스정류장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저만치 버스가 보인다.
타기는 틀렸구나 하고 절망적인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런데 군인 한 명이 내 무거운 가방을 낚아채더니 달리기 시작한다.
당황해서 쳐다보는데 또 다른 한 명이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한다.
얼결에 뛰어가며 보니 몇 명의 군인들이 버스를 막고 서 있다.
개울가에서 아침준비를 하던 군인들이 환호성과 떼창으로 응원도 한다.
이른 아침에 난데없는 소동으로 동네가 시끌시끌하다.
버스 기사 아저씨도 빙긋 웃으며 내가 끌려(?)오는 것을 재미있는듯 보시고 버스 안의 꽉 찬 학생들도 환호성을 지른다.
버스에 탄 후 안도감에 한숨을 쉬고 나니 창피함이 쓰나미로 몰려온다.
제각기 한 마디씩을 하는 선후배, 친구들의 입을 막고 싶다.
한동안은 보는 사람마다 인사처럼 그 날을 얘기한다.
그 이후로 아침마다 밍기적거리게 하는 귀찮음병이 사라졌다.
굉장한 단합력으로 기민하게 행동하여 나의 지각을 면하게 해 준 그 날의 군인아저씨들께 새삼 고맙다.
나라도 지키고 내 지각도 지켜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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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11. 11:30 / 병마골 이야기

새벽에 개가 하도 짖어서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나가보니 이등병과 상병 아저씨 둘이 추위에 덜덜 떨며 손에 라면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다.
불침번을 서는데 너무 추워서 뜨끈한 라면이라도 먹고 싶다며 미안한 표정으로 부탁을 한다.
졸립고 춥고 귀찮아서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어찌할까 하는데, '커험!' 하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두말 하지 말고 끓여주라는 뜻이다.
하는 수 없이 부엌의 불을 켜고 들어가 가마솥에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붙인다.
무쇠솥이라 물이 끓으려면 한참 불을 때야한다.
군인아저씨들은 마당에 선 채 기다리길래 추우니 부엌으로 들어와 불을 쬐라고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들어온다.
엄청 추웠나보다 하는 생각에 귀찮아했던 것이 오히려 미안해진다.
라면을 커다란 밥통에 담아서 건네주니 아저씨들은 미안함, 고마움, 행복함을 다 얼굴에 담고는 연신 꾸벅거리며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라면을 끓인 솥을 다 닦고 아궁이 불씨를 단속하다가 문득  다른 초소의 군인들도 춥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솥에 물을 넣고 불을 때서 팔팔 끓여 양동이에 담아서 아저씨들에게 가져다 준다.
어둠 속의 기척에 잔뜩 경계를 하며 총부리를 들이대서 깜짝 놀라긴 했지만, 양동이를 드리면서 '난로삼아 손이라도 녹이세요' 하니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한다.
괜히 기분이 더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온다.
아침에 나가보니 라면을 담았던 밥통이 깨끗하게 씻은 상태로 마루에 놓여있다.
맛있게 드셨을 것을 생각하니 또 기분이 참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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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11. 11:11 / 병마골 이야기

훈련기간 동안은 걸어서 집에 가야하므로 우리만 일찍 하교한다.
반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으쓱으쓱 학교를 나선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터덜터덜 걷는다.
먼 거리지만 친구들과 떠들고 웃으면서 걸으니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다.
종종 구보하는 군인 행렬을 만나면 휘파람을 불고 목청껏 불러대고, 그런 군인들을 단속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뒤엉켜 한동안 왁자하다.
또 운전연습 하는 군용트럭이 줄줄이 지나가면 누런 흙먼지를 옴팡 뒤집어쓰고는 툴툴거리기도 한다.
가끔 군인들을 가득 태운 트럭이 지나갈 때면 군인들이 던져주는 건빵을 받아 먹는 재미도 있다.
손을 입에 대고 "저는 언니가 많아요~" 하면 건빵보다 고급진 건조볶음밥도 날아온다.
신나서 집에 오면 아버지는 힘들게 훈련하는 군인들의 식량도 뺏어먹느냐며 타박을 하신다.
내 방은 추수철만 되면 마른 옥수수로 가득 채워지고 밤마다 옥수수알갱이를 따야하는데, 훈련기간 동안에는 내 방을 군인들에게 내어줘야 한다.
추운 밤에 밖에서 자는 군인들을 교대로 돌아가며 따뜻한 방에서 재우려는 아버지의 배려로 나는 아버지 옆에서 칼잠을 자야한다.
부엌의 아궁이 두 개중 하나와 솥 하나도 군인 전용이다.
이래저래 불편하지만 식구들 누구도 불만스럽지 않다.
훈련이 끝나고 나면 내 방의 옥수수는 군인들이 다 딴 알갱이들로 가득하다.
내가 할 노동이 줄어드니 군인아저씨들이 고맙다.
다만 벽에  아저씨들이 주소를 써 놓아서 도배를 다시 해야 하는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
물끄러미 주소들을 보고 있노라니 군대에서의 힘듦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도배하기 전에 될 수 있으면 많은 군인들에게 위문편지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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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11. 10:42 / 병마골 이야기

초겨울 찬 이슬이 서리로 얼어붙을 때, 온 동네가 군인들의 함성으로 가득하다.
매년 이맘때면 있는 대규모 군사훈련이다.
수 백인지, 수 천인지 모를 군인들이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모의 전쟁을 한다.
투구에 두른 띠의 색으로 구분을 하는데, 우리는 아무 쪽이나 다 응원한다.
추수를 끝낸 밭에는 한가득 군인들의 천막이 들어차고 아직 수확하지 못한 일부 농작물은 늘 배가 고플 것 같은 군인들의 차지가 된다.
우리 집 주변의 넓은 밭에도 온통 군인들의 천막이 들어찼다.
아침에 등교하다 보니 천막 밖으로 군홧발이 비쭉 튀어나와 있다.
신발도 벗지 못하고 자나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군화 위로 서리가 하얗게 덮여있다.
얼마나 추울까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마른 옥수수잎을 한 무더기 긁어다가 덮어준다.
큰 개울가 자갈밭에는 줄줄이 솥이 걸리고 밥이며 국을 끓인다.
밥이 다 되었는지 솥뚜껑을 열고  밥을 푹푹 푸는데, 주걱이 아니라 식용 삽인 것이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본다.
어떤 군인은 투구에 소주를 콸콸 붓더니 그 소주로 세수를 한다.
왜 그러는지 궁금하지만 버스가 올 시간이 다 되었으니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군인아저씨들이 뭔가 설명하고 있다.
신작로에 지뢰를 묻어서 일반 차량이 통제되어 버스가 다닐 수가 없어 우리는 군용 트럭을 타야 한단다.
우리도 모의 전쟁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아서 왠지 신나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한 것을 곧 후회하게 되었다.
가리개도 없는 군용 트럭에 옹기종기 앉아서 덜컹거리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니 차가운 바람에 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난간을 잡은 손은 시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지고 이는 딱딱 부딪친다.
하얗게 서리를 덮어쓰고 혼이 다 빠진 몰골로 등교를 한다.
집에 올 때는 그나마 그런 트럭도 없이 12킬로를 걸어야한다.
지뢰는 1주일 정도 후에 걷는다고 하니 꽁꽁 얼어붙는 등교는 당분간 계속 되겠다.
그래도 매년 하는 이 훈련이 재미있어서 서릿발 등교쯤은 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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