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한 늑대 / 2025. 5. 11. 11:56 / 병마골 이야기

군사훈련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밤에 들리는 총소리에도 익숙해지고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통금과 통제도 처음만큼 불편하지 않다.
우리집의 펌프를 군인들과 같이 쓰다보니 지하수가 고갈되어 끼긱거리면서 물이 나오지 않아 저녁때에는 작은 개울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야 하는 불편함도 있지만 물 긷는 것을 너도나도 도와주는 군인들이 많으니 그것 또한 괜찮다.
아버지는 장을 담그실 때 아예 군인들 몫으로 한 동이 더 하신다.
장이 잘 익어 군인들이 항아리 바닥까지 닥닥 긁어서 가져가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부엌부터 내 방, 고추장 된장 등등 여러가지로 편의를 봐주고 내어주니 그 고마움에 훈련이 끝나고 부대장님이 인사를 하러 오시기도 한다.
그런데 군인들에게 오히려 내가 큰 도움을 받는 사건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밍기적거리다가 버스를 놓칠 위기에 처한 나는 허둥지둥 뛰기 시작했다.
저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는 두 시간 후에나 오니 필사적으로 뛰어야한다.
아직 버스정류장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저만치 버스가 보인다.
타기는 틀렸구나 하고 절망적인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런데 군인 한 명이 내 무거운 가방을 낚아채더니 달리기 시작한다.
당황해서 쳐다보는데 또 다른 한 명이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한다.
얼결에 뛰어가며 보니 몇 명의 군인들이 버스를 막고 서 있다.
개울가에서 아침준비를 하던 군인들이 환호성과 떼창으로 응원도 한다.
이른 아침에 난데없는 소동으로 동네가 시끌시끌하다.
버스 기사 아저씨도 빙긋 웃으며 내가 끌려(?)오는 것을 재미있는듯 보시고 버스 안의 꽉 찬 학생들도 환호성을 지른다.
버스에 탄 후 안도감에 한숨을 쉬고 나니 창피함이 쓰나미로 몰려온다.
제각기 한 마디씩을 하는 선후배, 친구들의 입을 막고 싶다.
한동안은 보는 사람마다 인사처럼 그 날을 얘기한다.
그 이후로 아침마다 밍기적거리게 하는 귀찮음병이 사라졌다.
굉장한 단합력으로 기민하게 행동하여 나의 지각을 면하게 해 준 그 날의 군인아저씨들께 새삼 고맙다.
나라도 지키고 내 지각도 지켜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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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11. 11:30 / 병마골 이야기

새벽에 개가 하도 짖어서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나가보니 이등병과 상병 아저씨 둘이 추위에 덜덜 떨며 손에 라면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다.
불침번을 서는데 너무 추워서 뜨끈한 라면이라도 먹고 싶다며 미안한 표정으로 부탁을 한다.
졸립고 춥고 귀찮아서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어찌할까 하는데, '커험!' 하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두말 하지 말고 끓여주라는 뜻이다.
하는 수 없이 부엌의 불을 켜고 들어가 가마솥에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붙인다.
무쇠솥이라 물이 끓으려면 한참 불을 때야한다.
군인아저씨들은 마당에 선 채 기다리길래 추우니 부엌으로 들어와 불을 쬐라고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들어온다.
엄청 추웠나보다 하는 생각에 귀찮아했던 것이 오히려 미안해진다.
라면을 커다란 밥통에 담아서 건네주니 아저씨들은 미안함, 고마움, 행복함을 다 얼굴에 담고는 연신 꾸벅거리며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라면을 끓인 솥을 다 닦고 아궁이 불씨를 단속하다가 문득  다른 초소의 군인들도 춥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솥에 물을 넣고 불을 때서 팔팔 끓여 양동이에 담아서 아저씨들에게 가져다 준다.
어둠 속의 기척에 잔뜩 경계를 하며 총부리를 들이대서 깜짝 놀라긴 했지만, 양동이를 드리면서 '난로삼아 손이라도 녹이세요' 하니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한다.
괜히 기분이 더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온다.
아침에 나가보니 라면을 담았던 밥통이 깨끗하게 씻은 상태로 마루에 놓여있다.
맛있게 드셨을 것을 생각하니 또 기분이 참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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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11. 11:11 / 병마골 이야기

훈련기간 동안은 걸어서 집에 가야하므로 우리만 일찍 하교한다.
반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으쓱으쓱 학교를 나선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터덜터덜 걷는다.
먼 거리지만 친구들과 떠들고 웃으면서 걸으니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다.
종종 구보하는 군인 행렬을 만나면 휘파람을 불고 목청껏 불러대고, 그런 군인들을 단속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뒤엉켜 한동안 왁자하다.
또 운전연습 하는 군용트럭이 줄줄이 지나가면 누런 흙먼지를 옴팡 뒤집어쓰고는 툴툴거리기도 한다.
가끔 군인들을 가득 태운 트럭이 지나갈 때면 군인들이 던져주는 건빵을 받아 먹는 재미도 있다.
손을 입에 대고 "저는 언니가 많아요~" 하면 건빵보다 고급진 건조볶음밥도 날아온다.
신나서 집에 오면 아버지는 힘들게 훈련하는 군인들의 식량도 뺏어먹느냐며 타박을 하신다.
내 방은 추수철만 되면 마른 옥수수로 가득 채워지고 밤마다 옥수수알갱이를 따야하는데, 훈련기간 동안에는 내 방을 군인들에게 내어줘야 한다.
추운 밤에 밖에서 자는 군인들을 교대로 돌아가며 따뜻한 방에서 재우려는 아버지의 배려로 나는 아버지 옆에서 칼잠을 자야한다.
부엌의 아궁이 두 개중 하나와 솥 하나도 군인 전용이다.
이래저래 불편하지만 식구들 누구도 불만스럽지 않다.
훈련이 끝나고 나면 내 방의 옥수수는 군인들이 다 딴 알갱이들로 가득하다.
내가 할 노동이 줄어드니 군인아저씨들이 고맙다.
다만 벽에  아저씨들이 주소를 써 놓아서 도배를 다시 해야 하는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
물끄러미 주소들을 보고 있노라니 군대에서의 힘듦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도배하기 전에 될 수 있으면 많은 군인들에게 위문편지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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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11. 10:42 / 병마골 이야기

초겨울 찬 이슬이 서리로 얼어붙을 때, 온 동네가 군인들의 함성으로 가득하다.
매년 이맘때면 있는 대규모 군사훈련이다.
수 백인지, 수 천인지 모를 군인들이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모의 전쟁을 한다.
투구에 두른 띠의 색으로 구분을 하는데, 우리는 아무 쪽이나 다 응원한다.
추수를 끝낸 밭에는 한가득 군인들의 천막이 들어차고 아직 수확하지 못한 일부 농작물은 늘 배가 고플 것 같은 군인들의 차지가 된다.
우리 집 주변의 넓은 밭에도 온통 군인들의 천막이 들어찼다.
아침에 등교하다 보니 천막 밖으로 군홧발이 비쭉 튀어나와 있다.
신발도 벗지 못하고 자나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군화 위로 서리가 하얗게 덮여있다.
얼마나 추울까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마른 옥수수잎을 한 무더기 긁어다가 덮어준다.
큰 개울가 자갈밭에는 줄줄이 솥이 걸리고 밥이며 국을 끓인다.
밥이 다 되었는지 솥뚜껑을 열고  밥을 푹푹 푸는데, 주걱이 아니라 식용 삽인 것이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본다.
어떤 군인은 투구에 소주를 콸콸 붓더니 그 소주로 세수를 한다.
왜 그러는지 궁금하지만 버스가 올 시간이 다 되었으니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군인아저씨들이 뭔가 설명하고 있다.
신작로에 지뢰를 묻어서 일반 차량이 통제되어 버스가 다닐 수가 없어 우리는 군용 트럭을 타야 한단다.
우리도 모의 전쟁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아서 왠지 신나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한 것을 곧 후회하게 되었다.
가리개도 없는 군용 트럭에 옹기종기 앉아서 덜컹거리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니 차가운 바람에 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난간을 잡은 손은 시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지고 이는 딱딱 부딪친다.
하얗게 서리를 덮어쓰고 혼이 다 빠진 몰골로 등교를 한다.
집에 올 때는 그나마 그런 트럭도 없이 12킬로를 걸어야한다.
지뢰는 1주일 정도 후에 걷는다고 하니 꽁꽁 얼어붙는 등교는 당분간 계속 되겠다.
그래도 매년 하는 이 훈련이 재미있어서 서릿발 등교쯤은 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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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5. 13:36 / 병마골 이야기

밭에 풀이 그득하다.
이 놈의 풀은 하룻밤새에도 쑥쑥 큰다.
비온 다음 날은 눈에 확 띌 정도로 엄청나게 많아진다.
아버지와 나는 밭에 김매러 갈 채비를 시작한다.
준비랄 것도 딱히 없고 모양이 다른 호미만 두어 자루 챙기면 된다.
오늘은 일단 콩밭으로 간다
밭에 도착하니 막 크기 시작하는 어린 콩보다 풀이 더 많고 더 크다.
아버지와 나는 밭고랑에 들어서서 김매기에 돌입한다.
아버지는 네 고랑, 나는 두 고랑을 맡는다.

뿌리가 단단한 풀을 뽑으려면 끝이 뾰족한 호미로 풀 뿌리를 찍은 다음 손으로 풀을 잡고 호미와 함께 힘을 주어 뽑아야 한다.
이럴 때 필요한 호미는 끝이 뾰족하고 몸체가 긴 호미가 필요하다.
반면에 밭 이랑에 아직 어린 풀들이 많을 때는 일일이 손으로 뽑기도 어렵고 아직 어린 풀이라 잘 끊어진다.
이럴 때 필요한 호미는 면적이 넓고 얇은 것으로, 풀들을 벅벅 긁으면 뿌리까지 다 긁어진다.
아버지는 네 고랑이나 맡고도 저 만큼 앞서가신다.
아버지를  따라잡으려고 기를 쓰고 호미질을 하는데, 까맣고 털이 숭숭 나 있는 벌레 한 무더기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아마도 이른 봄에 뿌린 거름 때문에 생겼나보다.
머릿속이 저릿저릿 하면서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돋는다.
뱀 보다 벌레를 더 무서워하는 나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비명을 꽥 지른다.
아버지가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오신다
혹시나 뱀한테 물렸나 싶으셨나보다.
벌레 때문에 덜덜 떠는 나를 어이없어 하신다.
그냥 돌아서는 아버지를 향해 소리를 크게 지른다.
"아부지! 나랑 바꿔유!"
아버지는 으이그~ 하시며 군밤을 콩 먹이시고는 내 자리에 앉으신다
나는 휴우~ 하고는 아버지가 계시던 곳으로 간다.
아버지는 금세 나를 따라잡으시고는 나를 보고 씨익 웃으시고 저 만치 앞서가신다.
나는 또 아버지를 따라잡으려고 고군분투를 하나 두 고랑을 맡은 아버지에게는 어림도 없다.
종종 나오는 지렁이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긴 하지만, 지렁이 때문에 그 때마다 아버지를 부를 수는 없으니 호미로 흙을 밀어 덮고 얼른 지나친다.
그렇지만 두엄벌레는 도저히 적응을 할 수가 없다
콩밭 하나를 매는 동안 나는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아버지와 자리를 바꿔달라고 해야 했고, 아버지는 그 때마다 군밤을 한 대씩 먹이고 바꿔주신다.
콩밭의 김을 다 매고 나니 그제서야 휴우~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김을 매는 동안은 내내 이런 일이 반복될 것이니 아버지도  참 피곤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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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5. 1. 10:41 / 병마골 이야기

비가 제법 내린다.
아버지가 우비를 챙겨 입으시면 뭔가 일을 하실 터이니 나도 우비를 입고 무조건 따라나선다.
아버지는 뒷밭에서 소쿠리에 들깨모종을 가득 들고 개울 건너 밭으로 가신다.
아하! 오늘 비가 오니 들깨를 심으시려는구나!
들깨는 참깨와 달리 미리 싹을 틔워 키운 다음 옮겨심어야 한다.
긴 밭이랑에 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는 들깨심기에 들어간다.
아버지가 호미로 작은 구덩이를 파면 언니는 들깨 모종을 4~5개쯤 잡아서 뿌리 쪽 줄기를 휘어서 놓는다.
그러면 나는 그 위에 흙을 덮고 발로 꾹꾹 밟는다.
비는 죽죽 내리는데, 환상의 3인조는 말도 없이 그저 들깨를 심는데 집중한다.
빈번하게 출몰하는 지렁이 때문에 수시로 나의 비명이 터질 뿐, 작은 골짜기 병마골은 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묻는다.
한나절 동안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며 열심히 일을 마치고 개울물에 흙으로 범벅이 된 장화를 휘휘 씻는다.
개구리들은 제 세상을 만났는지 여기저기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풀들은 세찬 빗줄기에 저항하지 않고 흔들흔들 장단을 맞춘다.
개울을 건너 집에 오는 길에 방금 작업을 마친 밭을 돌아본다.
나란히 줄지어 선 들깨가 비스듬히 누운 채 비를 맞고 있는데, 내 눈에는 비를 맞는 것 보다 비를 맛있게 마시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며칠은 비 온 후 자란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느라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들깨 생각을 못 하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들깨 밭에 비로 인해 파인 곳은 없는지 살펴보러 나가니 비스듬히 누워있던 들깨들이 조금씩 몸을 일으키고 있다.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촉촉한 비와 나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잘 자랄 것이다.
들깨를 털 때 자벌레가 많아서 벌써부터 걱정이 되지만, 햇 들깨로 짠 고소하고 향긋한 들기름과, 빨갛게 졸인 감자반찬에 토도독 뿌려질 것을 생각하면 하루쯤은 힘들어도 괜찮다.
들깨밭을 오갈 때마다 느껴지는 고소함이 병마골에 가득 퍼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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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4. 25. 19:09 / 병마골 이야기

농번기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촌에는 늘 일손이 부족하다.
특히 모내기는 시기가 중요해서 논이 많은 집은 전쟁을 치르듯이 모내기를 한다.
인근 군부대에서 지원을 나오기도 하는데, 농사 경험이 없는 군인들도 많기 때문에 모가 둥둥 뜨거나 너무 깊이 심는 경우가 있어서 이중으로 일하기 일쑤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거들어 경험이 많은 학생들이 군인들보다 더 환영받는 일꾼이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반 아이들과 모내기지원을 다녔다.
모내기 할 논에 도착하면 바지를 둥둥 걷고 맨발로 써래질을 끝낸  흙탕물로 가득한 논으로 거침없이 들어간다.
가로로 길게 늘어뜨린 줄에 어른 한 뼘 간격으로 빨간 줄로 표시가 되어있는데, 이 표식에 모를 심으면 된다.
군데군데 던져놓은 모를 집어들고 내 앞에 있는 4~5개 정도의 표식에 모를 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 줄을 넘기는 아이들이 "줄 넘어가요"를 외치며 한 뼘 정도 간격을 두고 뒤로 넘긴다.
다시 모를심고 뒷걸음치고를 논의 끝까지 반복한다.
허리가 뻐근해질 무렵 쉬었다가 하라는 외침에 논둑으로 나가서 다리에 묻은 진흙을 풀에 쓱쓱 닦다가 종아리에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지른다.
모두 놀라서 달려온다.
선생님께서 얼른 거머리를 떼어내니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나는 피를 보고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선생님께서는 지혈을 하시고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달래주신다.
그 때 마침 국수를 삶아 새참을 내어오신 논 주인아주머니가 우는 나를 보시고는 얼른 엿을 하나 주신다.
눈물을 뚝 그치고 국수를 맛있게 먹고, 엿까지 야무지게 먹은 나는 언제 울었나는 듯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다시 논으로 들어간다.
모내기를 다 마치고 줄을 맞춰서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논 주인 아저씨가 딸기껌 한 통씩 나누어주시며 수고했다고 하신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우리들은 노래를 부르며 학교로 돌아간다.
다음 날, 등굣길에 논을 지나는데, 어제 심은 모들이 초록색을 뽐내며 튼튼하게 자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춘다.
나도 기분이 좋아서 뜀뛰기를 하면서 학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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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늑대 / 2025. 4. 22. 15:24 / 병마골 이야기

산과 들에 여린 새싹이 돋더니 어느새 온통 초록으로 덮였다.
따뜻해진 날씨에 새들도 알을 낳고, 올챙이랑 도롱뇽도 나날이 쑥쑥 커간다.
우리 동네 사람들도 농사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겨우내 단단했던 논의 흙을 갈아엎고 물을 대어 논 흙이 부드러워지게 한다.
굵은 흙덩이는 써래질로 곱게 부수어 모 심을 준비를 마친다.
집 근처 논 한 구석에 길게 자리한 비닐하우스 안에는 한 뼘 정도 자란 모들이 빽빽하다.
우리집 모내기 하는 날, 아침 일찍부터 아버지는 모를 뽑아 한 줌씩 묶어서 모내기를 할 논으로 나르신다.
언니와 나는 품앗이를 하러 오실 동네아저씨들이 드실 새참과 점심 준비에 바쁘다.
큰 가마솥에는 평소에는 보기 힘든 흰 쌀밥이 가득 구수하게 지어지고, 작은 무쇠솥에서는 국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화로에는 정말 보기 힘든 들기름 바른 김이 석쇠 위에서 구워지고, 다른 화로 위에는 새벽부터 콩을 갈아서? 만든 두부가 먹음직스럽게 졸여지고 있다.
이런 저런 반찬들을 차례차례 만들어 큰 통에 담으면 이제 논으로 나르는 일만 남았다.
큰 소쿠리에 밥과 반찬들을 넣고  큰 주전자에 막걸리를 걸러 담고 잔을 챙긴다.
소쿠리를 머리에 인 언니가 앞장서고 막걸리 주전자를 든 내가 그 뒤를 따른다.
논에 도착하니 바지를 걷어부치고 모를 심는 아저씨들의 노랫소리가 흥겹다.
"진지 드세요~" 하고 외치니 아이구 반갑다 하시며 논흙이 묻은 손을 논두렁 풀로 쓱쓱 닦으며 하나 둘 나오신다.
여기저기 앉으신 아저씨들께 밥을 푸고 국도 푸고 나물도 담아 나누어드린다.
아저씨들은 막걸리부터 꿀꺽꿀꺽 넘기고 크으~~  좋다~ 감탄을 하시고 나서 밥을 드신다.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바쁘게 준비한 보람으로 뿌듯하다.
빈 그릇들을 챙겨서 논 옆 개울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아저씨들이 찔레순을 한 줌 꺾어다 주신다.
잘 먹었다는 인사다.
언니와 나는 서둘러 집으로 와서 바로 새참 준비를 한다.
1년 중에 모 심는 날과 벼 베는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를 하기 때문에 큰 행사를 치르는 듯 분주하다.
작은 잔치가 벌어지는 듯 정신없이 바쁘지만 평소에 먹기 힘든 음식들을 먹을 수 있어서 기다려지기도 한다.
뿌리를 잘 내리고 포기 수를 늘리며 커가는 벼를 보면 기분이 참 좋다.
잘 자라서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면서 벼베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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