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골은 조금만 주변을 살펴보면 맛있는 과일이 많다.
산딸기, 머루, 개복숭아, 다래, 버찌, 꽈리, 돌배 등등
계절마다 맛과 향기가 제각각인 과일과 열매들이 척박한 산골의 보석들이다.
그런더 아버지는 바깥 마당 끝에 사과나무를, 마당 어귀와 뒤울 밖 울타리에 고야(토종 자두), 개울로 가는 밭 언저리에는 앵두나무와 대추나무 등의 과일나무를 심어서 입이 심심할 틈이 없다.
매년 매 계절마다 먹는 과일과 열매들이지만, 매번 익기를 기다리고 매번 맛있다.
어느 여름날 휴가를 맞아 집에 온 언니는 양 손에 푸짐하게 선물을 들고 왔는데 그 중에 보랏빛이 참 예쁜 포도가 있었다.
머루보다 알이 훨씬 큰 포도는 머루보다 약간 신 맛이 더하긴 하지만 알이 굵은데다가 처음 먹어보는지라 신기하고 맛있다.
포도 껍질과 씨는 우리집 소가 맛있게 먹었으니 언니가 사 온 포도는 정말 알뜰하게 먹은 것이다.
가을과 겨울이 지나는 동안 포도는 까맣게 잊혀졌다가 봄에 깜짝 놀랄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이른 봄에 두엄을 밭에 거름으로 뿌렸는데 밭이랑에서 머루싹이 터서 자라길래 가지를 꺾어서 마당 옆 울타리 아래에 심었다.
그런데 점점 자랄수록 머루 잎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니 열매를 맺으면서 머루가 아니라 포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년에 소가 먹은 포도씨가 두엄에서 싹이 튼 것이다.
참 신기한 마음에 물도 주고 거름도 주면서 온갖 신경을 써 주니 점점 굵어지던 초록색의 포도알들이 차츰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언제쯤 익어서 먹어보려나 날마다 포도를 들여다보았는데, 드디어 포도송이 전체가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먹을 때가 다 되었다는 신호를 한다.
신이나서 집으로 한달음에 뛰어들어간 나는 양푼을 찾아들고 포도를 따기 위해 대문을 돌아 나오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일이 벌어졌다.
우리집 말썽쟁이 도꾸가 시원한 포도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서 포도를 한 알 한 알 맛있게 따 먹고 있다.
"야! 그걸 니가 왜 먹어~" 소리치며 도꾸를 밀쳤지만 도꾸는 꿈쩍도 않고 태연하게 계속 포도를 따 먹는다.
개가 포도를 먹는 것도 처음 보는지라 기가 막히고, 애지중지 기른 포도나무에 처음 열린 포도를 남김없이 다 따먹는 것도 어이가 없다.
약이 잔뜩 오른 나는 도꾸의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리면서 분통을 터뜨리는데, 지게에 소가 먹을 꼴을 한아름 지고 들어오시던 아버지가 그런 나를 보고 한마디 하신다.
"너무 혼내지 말어
처음 열리는 과일을 동물이 먹으면 그 다음 해 부터는 아주 많이 열린단다."
아버지 말씀에 도꾸를 놓아주었지만 며칠동안은 포도나무를 볼 때마다 도꾸에게 군밤을 먹이곤 했다.
그런데 아버지 말씀이 정말이었는지 그 이듬해에 포도나무가 휘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열린 포도는 맛도 기가막혔다.
나는 포도를 먹을 때마다 도꾸에게도 한 송이를 주면서 한동안 미워했던 것을 사과했다.
그 이후로 처음 열리는 과일은 무조건 도꾸가 치지하곤 했다.
느긋한 늑대 / 2025. 2. 8. 23:47 / 병마골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