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골 이야기

장닭에게 고춧가루를 먹였더니

느긋한 늑대 2025. 6. 6. 19:21

개, 고앙이, 닭은 우리집을 지키는 동물 3총사이다.
개는 뛰어난 청각과 충성심으로 무조건 짖어대고, 고양이는 존재감만으로 쥐를 막아준다.
닭은 딱히 우리를 지켜준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아버지가 특단의 조치를 하신 이후로 부터 가장 든든한 지킴이가 되었다.
잘 짖고 용감하던 도꾸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 가족이 된 흰둥이는 정말 순둥순둥해서 낮선 사람이 와도 멀찌감치에서 꼬리만 살랑살랑 흔든다.
산골의 외딴 집이라 산짐승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낯선 사람이 오면 경계도 해야 하는데 도통 이 녀석은 제 역할은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흰둥이만 보면 " 이녀석! 밥값을 해야지!" 하시며 나무라시는데 흰둥이는 눈치만 슬슬 보면서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으셨는지 아버지는 암탉들을 끌고 다니는 두 마리의 장닭을 부르시더니 모이에 고춧가루를 섞어 주신다.
장닭들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모이를 맛있게 콕콕 찍어 먹더니 한참만에 매운걸 알았나보다.
고개를 홱홱 내젓고 모래흙에 주둥이를 박고 휘젓는 등 당황하는 모습이다.
너무 학대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는데, 이놈들이 고춧가루의 참 매럭을 알아버렸다.
틈만 나면 고추밭에 가서 땅에 떨어진 고추와 고추잎을 쪼아먹는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몇 번 모이에 고춧가루를 섞어 먹이시며 너희들이라도 집을 지켜라 하신다.
정말 고춧가루를 먹고 사나워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장닭 두 마리는 누군가가 우리 집을 오기 위해 길 모퉁이를 돌아서서 들어오기만 하면 날개를 퍼덕이고 길길이 날뛰며 부리로 쪼아댄다.
싸리빗자루를 휘둘러 쫒고서야 겨우 말릴 수 있다.
아버지는 고춧가루를 먹여서 사나워진 거라며 허허 웃으신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닭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달려드는 닭들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겪어야 한다.
닭부리에 찍히면 정말 아프다.
이제는 집에 올 때면 닭의 눈치를 봐야 하니 개가 순해서 했던 걱정 보다 더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아버지는 고춧가루를 조금만 먹일걸 하신다.
결국 우리집을 든든하게 지키던 장닭 두 마리는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져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한여름 복날 동네 어른들의 몸보신에 희생되면서 닭의 시달림에서 벗어났다.
그 이후로 다시는 닭에게 고춧가루를 먹이지 않기로 했다.
나는 봄에 장터에서 사 온 병아리들이 커가면서 고추받으로 들어가면 얼른 쫒아낼 만큼 예민한 기억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