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골 이야기

고소한 들기름의 시작

느긋한 늑대 2025. 5. 1. 10:41

비가 제법 내린다.
아버지가 우비를 챙겨 입으시면 뭔가 일을 하실 터이니 나도 우비를 입고 무조건 따라나선다.
아버지는 뒷밭에서 소쿠리에 들깨모종을 가득 들고 개울 건너 밭으로 가신다.
아하! 오늘 비가 오니 들깨를 심으시려는구나!
들깨는 참깨와 달리 미리 싹을 틔워 키운 다음 옮겨심어야 한다.
긴 밭이랑에 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는 들깨심기에 들어간다.
아버지가 호미로 작은 구덩이를 파면 언니는 들깨 모종을 4~5개쯤 잡아서 뿌리 쪽 줄기를 휘어서 놓는다.
그러면 나는 그 위에 흙을 덮고 발로 꾹꾹 밟는다.
비는 죽죽 내리는데, 환상의 3인조는 말도 없이 그저 들깨를 심는데 집중한다.
빈번하게 출몰하는 지렁이 때문에 수시로 나의 비명이 터질 뿐, 작은 골짜기 병마골은 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묻는다.
한나절 동안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며 열심히 일을 마치고 개울물에 흙으로 범벅이 된 장화를 휘휘 씻는다.
개구리들은 제 세상을 만났는지 여기저기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풀들은 세찬 빗줄기에 저항하지 않고 흔들흔들 장단을 맞춘다.
개울을 건너 집에 오는 길에 방금 작업을 마친 밭을 돌아본다.
나란히 줄지어 선 들깨가 비스듬히 누운 채 비를 맞고 있는데, 내 눈에는 비를 맞는 것 보다 비를 맛있게 마시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며칠은 비 온 후 자란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느라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들깨 생각을 못 하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들깨 밭에 비로 인해 파인 곳은 없는지 살펴보러 나가니 비스듬히 누워있던 들깨들이 조금씩 몸을 일으키고 있다.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촉촉한 비와 나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잘 자랄 것이다.
들깨를 털 때 자벌레가 많아서 벌써부터 걱정이 되지만, 햇 들깨로 짠 고소하고 향긋한 들기름과, 빨갛게 졸인 감자반찬에 토도독 뿌려질 것을 생각하면 하루쯤은 힘들어도 괜찮다.
들깨밭을 오갈 때마다 느껴지는 고소함이 병마골에 가득 퍼지는 듯 하다.